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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Oct 03. 2022

욕망의 길을 가다, 부채길

수려한 풍광을 보면서도 힐링하고 사유하며 걷기란 너무 유명해서 불가능하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산의 경치를 갈망하고, 산에 사는 사람들은 바닷가의 시원하고 넓은 경치를 보고 싶어 한다. 호주 시드니의 여행 중에 오페라하우스에 간 적이 있다. 주변을 조깅하는 현지인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매일 그곳을 걷고 달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여행객이 느끼는 감정과 같을까? 단호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냥 평범한 일상일 뿐일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다름과 새로움에 대한 욕망이 늘 사거리 신호등처럼 교차하고 있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것으로 이를 실현시키고 있다.  


1박 2일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강릉 심곡항 바다부채길로 갔다. 블로그와 각종 SNS엔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 찬 명소로 소개되고 있어 큰 기대를 안고 갔다. 자동차로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수평선이 펼쳐진 해안가를 걷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설렘이 오지 않는가.


좁은 주차장에 빼곡한 차들로 북적되고 있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풍경의 첫인상은 참 좋았다.    

매표소 긴 방파제 끝에 있는 빨간 등대는 존재만으로 안심이 되는 정겨운 이정표다. 시멘트로 기둥을 세우고 철로 난간을 만든 곳에 등 하나 설치했을 뿐인데, 이렇게 간단한 문명이 인간에게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인생 샷에서 등대 배경은 매번 옳거나 성공적이다. 온통 파란색에 뜬금없는 듯한 빨강은 지극히 자극적이고 독특한 존재로 부각된다. 배경의 끄트머리에라도 등장해야 비로소 풍경이 완성되는 되는 존재이며, 아스라한 수평선을 뒤로한 수채화엔 빨간 등대가 화룡점정이다.

등대는 존재만으로도 귀하게 대접받는다.


해안가의 기암괴석과 흰 파도가 부서지는 인공의 산책로는 오르락내리락하며 기막힌 풍광을 자아낸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에 만든 길이니 원래는 없던 길이다. 있었다고 해도 해안을 감시하기 위한 초병들이 간신히 다니던 최소한의 길일 뿐이었다. 그런 곳에 철제 다리를 세우고 길을 놨다.

그래서 부채길은 억지스럽긴 하지만 관광객을  끌기 위한 지자체의 간절한 노력과 새로움을 찾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욕망이 또 한 길이 만든 셈이다.


뒤에 오는 이에게 쫓기지 않고, 앞서가는 이를 쫓지 않으며, 마주오는 이의 표정에서 웃음과 여유를 멋진 바다 뷰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공미의 아쉬움을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커버함으로써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너무 유명해진 탓에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으니 조용하게 즐기기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단체관광객과 산악회원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기 때문에 힐링과 사유를 생각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다.

자아가 막 형성되는 미운 일곱 살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알리기 위해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할 정도의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움이 이해될 수 있지만 어른은 다르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도 괜찮은 것이 존재를 부각 시킨다거나 자신들만이 특권을 누리는 듯한 희열감은 착각이며 치희에 가깝다. 부끄러워해야 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부채길 곳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산악회 어른들 얘기다. 쉼터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앉아서 음주를 즐기고 있다. 그들은 다수의 힘을 믿고, 부끄러움을 잊은 채 오히려 자랑스럽게(?) 음주를 하며 지나치는 여행객들의 따가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거니 받거니 음주를 즐기고 고성으로 대화를 나누며 그들만의 리그를 진행한다. 공원 내에서의 음식물 섭취나 음주는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는 경고를 비웃듯 무력화시킨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산악회 중에서 술 마시지 않거나 절제하는 산악회가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나란히 앞 뒤로 서서 파도소리를 듣고 해풍을 맞으며 걷는 여유로운 발걸음이 있는가 하면 마주오는 사람을 비켜 추월을 못 나가 안달하는 여행객이 있다. 풍경이나 여유는 오간데 없고, 오로지 걷는 게 목적인지. 아니면 부채길 명소를 걸었다는 명분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일행과 떨어졌거나, 시간이 없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한 걸음 물러 서서 봐도 괜스레 불편했다. 왜 내 눈엔 그런 게 자꾸 보이는 건지.


부채길은 끊임없이 나오는 푯말의 전시장이다. 미끄럼주의, 파도주의, 낙석주의.

미끄럼주의는 이해가 간다. 물기가 있으니 걸을 때 개개인이 조심해서 걸으면 사고 예방이 가능하다. 그런데 낙석주의나 파도주의도 그럴까. 내가 주의를 기울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에서 정선여행을 하며 낙석주의에 대해 재미나게 해석한 글귀가 있다.


'낙석주의'라는 삼각표지가 반 공갈조로 붙어있다. (중략) 세상에 낙석주의라니! 빨리 가라는 말인가 천천히 가라는 말인가.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돌 떨어져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 아닌가. 요는 각오하고 가란 뜻이다. (중략) 석락(石落, falling stone)주의가 아니라  낙석(落石, fallen stone)주의인 것이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2,유홍준,p138)


수 십 미터 벼랑 위에 매달려 있는 바위 덩어리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아슬아슬한 길을 걷고 있노라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건 사실이다. 낙석주의라는 것이 머리 위로 바위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하늘을 보며 주의하라는 인지, 돌이 떨어질 것에 대비해서 어디로 대피할 것인지 살피며 걸으라는 것인지. 어떻게 해석해도 답은 없다.  


또 파도주의는 어쩌라는 것인가. 태풍이 오고 바람이 강하면 출입을 통제할 테고, 그래도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입장을 시킬 텐데, 넘어오는 파도는 어떻게 주의를 하라는 말인지. 겨우 사람 둘 정도가 교행이 가능한 너비의 길 위에서 내가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월파가 있을 때 내가 주의할 수 있는 범위나 정도는 어떻게 되는가.


어쩌란 말인가. 책임을 피하거나 줄이기 위한 지극히 행정적인 권고일 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나, 공원에서의 음식물 섭취나 음주에 과태료가 부과된다고 한들 그 밑에서 비웃듯 위법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부채길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바다는 늘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던 사람에게는 로망 같은 존재다. 아마도 제주가 육지인들의 선망이 되는 건 30분 내외로 바다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그런 조건을 갖춘 제주에 산다고 인생이 마냥 행복할까. 그 일상에 녹아든 내가 여행객 같은 행복을 느낄까. 아닐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의 일상 속에서 열심히 살다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도 가고, 성산포가 보이는 제주도 여행을 하는 삶이 더 설레고 행복하지 않을까.      


수평선 저 멀리 드 넓은 바다를 보고 그 푸른색으로 물든 하늘을 보며 걸었던 부채길. 이래저래 부정이든 긍정이든 생각에 생각을 더 했던 산책길이었다.  

한 동안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파도 소리도 듣고, 이마의 땀을 말리는 해풍을 맞으며 저 멀리 눈 시원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어도 좋고, 갈매기와 오가는 낚싯배를 스케치해보는 여유를 부려도 좋은 부채길이라면 더 바랄 게 없으련만... 이 또한 내 욕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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