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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Oct 10. 2022

인생은 아름다워? 아니 "아름답고 싶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인생은 아름답다"

아니 인생은 아름답고 싶은 거겠지. 차근차근 따져보면 굉장히 슬픈 과정이 아닐까. 마치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슬픈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휴일에 별일 없으면 상영 중인 영화를 찾아보곤 하는데 며칠째 별 다르게 눈에 띄는 영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보고 극찬을 하길래 이 참에 봐야겠다 싶어 한글날 아침 늦잠을 포기하고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9점을 상회하는 관객 평가 점수에도 불구하고 관객수는 백만에도 훨씬 못 미치는 아쉬움에 고민을 했었다. 뻔한 드라마 같은 소재겠거니 또는 억지웃음을 자아내거나 어색한 상황 설정으로 작품성이 떨어지겠거니 따위의 선입감이 때문이었나. 

어떤 주말 연속극에서 봤을 법한 상황 설정은 맞지만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와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한 남주의 엉성한 춤 솜씨가 처음엔 거슬리는 듯했지만 투박하고 세심하지 못한 현실과 딱 맞게 느껴지는 묘한 매력까지 더해 꽤나 괜찮은 영화였다. 


관객 숫자는 감독이나 배우, 제작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긴 하겠지만 한 사람의 관객에 불과한 내겐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역시나 보길 잘했다. 개인적 취향에 불과하겠지만 올해 천만을 넘은 영화 관객들을 뭐라 할 순 없지만 '인생은 아름다워'같은 영화가 그 반에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꽉 막힌 답답한 상황을 욕하고, 때리고, 부수고 죽이는 것을 보며 풀어야만 할까? 꼭 그래야만 했냐?

인간에겐 비극적 슬픔을 통해 감정을 정화하는 기능인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나. 

보통의 엄마 또는 여자 혹은 아내인 오세연(염정아)을 통해 감정을 이입해 보면 생각만으로 눈물샘이 열리지 않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희생자의 역할과 그 희생을 당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고 있는 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원거리 발령으로 기차 출퇴근할 땐 출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신호위반(이것을 우리는 도루라고 불렀다)을 감행하며 역사로 달리기도 했고, 새벽 출장이 있는 날엔 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주고, 자기 일하는 시간을 쪼개 아이들 학원으로 김밥을 배달하고, 자기 통장으로 들어오는 수입을 탈탈 털어 새끼들 주머니에 용돈을 넣어주는... 

세상에 이것뿐이겠는가.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오세연은 묵묵히 해냈다. 안 입는 낡은 옷을 찾아 입고, 비싼 것은 새끼들 사주면서 자기는 인터넷에서 몇 천 원 하는 싸구려를 사놓고도 너무 좋다며 너스레를 떠는 걸보며 '궁상떨지 말라'고 면박을 주는데도 '좋기만 한데 왜 그러냐?'며 천연덕스럽게 웃었지. 


인생이 뭐가 아름다워. 아등바등 사는 과정 속에서 뛸 듯이 기뻤던 시간들도 다 추억으로 묻히고 결국은 쌔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사망신고서라는 종이 한 장'으로 끝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또 다른 인생으로 연결되고 이어지는 것은 삶의 과정 속에서 만나는 기쁘고 슬픈 추억들이 소멸이 아니고 징검다리처럼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고 추억되며 연결되어 살아갈 힘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내 기쁨과 슬픔이 아들과 딸들에게 또 그 아들과 딸들에게로.

그래서 인생이 아름다운 거겠지. 

소멸이 기정사실이기에 영화처럼 화려하게 막을 내리길 소망해 본다. 그런 연구와 고민은 꼭 필요해 보인다.


영화가 끝나고 맛있는 점심을 먹자고 해 놓곤 기껏 주꾸미 덮밥에 북적이는 유명 카페에서 드립 커피가 고작이긴 했지만 영화적 상황을 속속들이 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OST'곡을 크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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