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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글 Jun 10. 2020

엄마 이제 과일 안 보내도 돼요

정말이에요


딱 이맘때였을까. 작년 여름 엄마는 백도를 한 박스 보내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박스는 넘 많지 않나 싶지만, 타지에서 자취하면서 과일을 자주 사 먹지 못하는 두 딸들에게 섭섭지 않게 먹으라는 뜻이었으리라.



산지 직송으로 배송된 복숭아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우왕. 엄마가 복숭아 보낸다더니 벌써 왔네, 야호! 를 속으로 외치며 가뿐하게 집안으로 들어 날랐다.



unsplash


얼른 씻어서 까먹고 엄마한테 영통 해야지, 했는데...



'스샥샥-'



연분홍빛 탐스러운 복숭아들 사이로 까맣고 긴 뭔가가 호다닥 지나갔다. 하필 막 씻고 나온 상태에 콘택트렌즈도 뺀 상태여서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 채로 놓치고 말았다. 우아아악! 하고 요란스럽게 소리만 지르고. 후하 후하, 몇 차례의 심호흡 후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툭툭 건드렸다. 이 녀석이 지금이라도 정체를 밝히면 좋은 건가, 아닌가, 고민하다 고무장갑을 꼈다.


그래, 일단 집 밖에 두자. 그렇게 다시 현관문 앞으로 원위치.  



복숭아의 거처, 콕 집어 말하자면 복숭아 사이 생명체의 향방을 고민하다 1층 경비실로 향했다. 각종 모기 잡는 스프레이, 바선생 잡는 스프레이를 들고서.



평소에는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던 경비실 반장님의 문을 두드렸다. 그날은 할아버지뻘 되는 반장님이 지키고 계셨는데, 사연을 듣곤 껄껄 웃으시더니 복숭아 사이사이에 약을 촤아악 촤아악 뿌려주셨다. 이리저리 들고 살펴보기까지 했지만 결국 그놈은 잡지 못했다. (대체.. 어디로 간 거니?)   



"없는디? 없구먼."

그렇게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약으로 절여진 복숭아를 안아 들고 집으로 다시 올라왔다. 뒤늦게 놀랜 마음이 찾아왔다. 엄마에게 투정 아닌 투정 전화를 걸었다.



“엄마, 으엉엉. 과일을 뭐 박스째로 보내고 그래. 아니 벌레 같은 게 있었는데, 아니아니 잡진 못했는데, 못 먹게 됐다구, 그래도 농약은 안 친 거였나 부다, 엉엉.”



그날 이후로 경비실 반장님과 (혼자서) 조금 친해진 마음이 든 나는, 종종 경비실을 지날 때에 간식이 손에 들려있으면 나누곤 한다.


오늘은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2+1 하는 월드콘을 사 오는 길이었는데, 마침 저녁식사를 마치셨을 시간대여서, 넉살 좋게 인사를 드렸다. 이런 때엔 또 낯 안 가리지.  



"안녕하세요! 저녁 드셨어요?"

"예에, 먹었죠." 

"이거 하나 드세요! 녹기 전에 얼릉요!" 

"허허 고마워서 이거, 잠깐 있어봐요. 과일 하나 드릴게."



세대를 훌쩍 뛰어넘은 사이에서 간식을 나눠 먹는 일이 신선해서였을까. 어르신이 주시는 건 거절하는 게 아니라 배워서였을까. 큰절을 올리고 용돈을 기다리는 어린애로 돌아간 기분으로, 1층 로비를 잠시 동안 둥실둥실 서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장님은 사과 하나를 들고 나오셨다.



"이거 드셔. 흠은 났는데."

"우왕.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하하, 저도 잘 먹을게요! 녹기 전에 드세요!"



아무튼, 엄마 이제 과일 안 보내도 돼요. 그때 보내준 거 못 먹었어, 미안. 벌레가 무서워서 벌벌 떨지만 간식은 잘 바꿔 먹는 딸이 됐어.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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