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이야기,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앞서 우리는 정치의 정의에 대하여 살펴보고, 정치 이야기가 왜 싸움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싸움이 될 소지가 있는 주제인데, 그럼 굳이 정치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 정치 이야기 꼭 해야 하는 것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우리가 잃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우리의 한 표가 가지는 가치
1억 2682만원. 어느 날 전 국민에게 5년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개인당 1억 2682만원을 원하는 대로 쓰게 해 준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는 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고민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갖고 돈을 쓰는지 살펴보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하거나 의논도 해볼 것이다. 아무튼, 모두 일정한 고민의 과정을 통해 성립된 나름의 판단기준을 갖고 저 돈의 사용처를 정할 것이다.
1억 2682만원을 산술적으로 계산한 우리 모두의 한 표의 가치다. 우리는 5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다. 2021년 기준 한국 정부의 1년 예산이 558조원인데, 대통령은 1년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산술적으로 대통령 임기(5년)에 558조원을 곱하고, 이를 전체 유권자 수(약 4400만명)로 나누면 나오는 액수가 약 1억 2682만원이다.
대통령이 예산편성권 외에도 규제를 신설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행정법령 제·개정권, 공직자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 체결·비준권 등 우리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다른 막강한 권한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한 표의 실질적 가치는 1억 2682만 원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3.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우리가 잃는 것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한 표를 행사하는가? 아니, 그보다 어떤 기준을 갖고 한 표를 행사해야 하는지 그 기준을 어디에서 찾는가? 우리가 투표를 하는 행위는 누가 선출권력을 획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행위이고, 누가 선출권력을 획득하는지에 따라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정치의 또 다른 정의가 “희소한 가치(자원)의 권위적 배분”(Easton 1953)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한 표를 행사하는 행위는 투표권이라는 권위를 통해 국가 자원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우리가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우리의 가치 있는 한 표를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겠는가?”이다. 물론, 타인과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관심을 기울여 우선순위를 정하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지난 제20대 대선에서 각 후보가 어떤 공약들을 대표적으로 내세웠는지, 그 공약들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고, 판단기준을 세우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물론 타인과 정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든 정보가 획득되거나 타당한 판단의 기준들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대화를 복잡한 현상이 단순화되고 내 머릿속에 있던 파편적인 생각들이 정리되는 것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즉, 대화는 파편화된 팩트를 단순화하고 재구성해주는 과정이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 더 정제되고, 조금 더 나의 이익에 합치하는 판단기준을 정립해나갈 수 있다. 이를 좀 더 정돈된 단어로 표현하자면 숙의(deliberation)의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잃는 것이 바로 이 숙의의 과정이다. 정치 이야기를 하며 발생할 수 있는 감정싸움의 회피가 정치 이야기의 배제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우리가 잃는 것의 무게가 더 무겁지 않을까?
참고문헌
Easton, David. The Political System: An Inquiry into the State of Political Science. New York: Alfred A. Knop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