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이상한 섬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남들에게 부탁하는 것을 이상하리만큼 싫어했었다.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아쉬운 소리 하는 게 가오가 빠져서인지 아무튼 부탁이란 게 늘 어려웠다.

대학생 시절 꼭 해보고 싶었던 청와대 인턴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엄청난 기대를 갖고 지원한 건 아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서를 넣었다. 운 좋게 서류전형은 합격을 했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로부터 한 1년쯤 지났을까? 국회에서 같이 일하던 시절 알게 된 분들과 식사자리가 있었는데, 청와대 인턴 넣었다 떨어진 얘기를 했더니 보좌관님 한분께서 “인마, 지원했었으면 말을 해야지”라고 탄식(?)하셨다. 살면서 이와 같은 비슷한 일화가 몇 번 더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야 느낀 점은 본인에게 부탁하지 않은 것을 다소 섭섭해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여의도라는 이상한 섬에는 꽤 많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내가 내린 결론은, 여의도 사람들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탁이 바로 그 이상한 섬의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탁은 상대에게 빚을 지겠다는 의미다. 상대가 나에게 빚을 진다는 것은, 나도 언젠가 상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불확실한 여의도의 삶에서 서로 빚을 지고 도움을 주며 형성되는 이 관계들은 삶의 큰 자산이고, 언젠가 힘든 상황이 오면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이유로 서로 부탁을 하고 빚을 지고 하는 게 아닐런지. 이상한 섬의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자 삶의 동지들을 찾는 방법, 그게 바로 부탁이지 싶다.

삼국지를 보면 백성들은 제도와 물질을 통해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조조보다 아무것도 없고 함께 하면 고생길이 뻔한 유비를 택한다. 조조가 자신을 버리고 유비를 따라가는 백성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독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했고, 유비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사고파는 관계는 거래가 끝나면 관계도 끝이 나지만, 무언가를 주고받은 관계는 주고받음이 끝나더라도 남아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

아무튼, 이런 계기들을 통해 이제 나도 예전보다는 다소 뻔뻔하게 부탁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부탁으로 인해 받은 도움으로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다. 여의도라는 이상한 섬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물론 보편적인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퍽퍽한 무한경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사람 냄새나는 생존 방식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