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틀스 헌정밴드 멘틀스와의 만남
“비틀스는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비틀스 음악은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 팝음악에 비틀스 DNA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측면에서 비틀스는 위대하다고 봅니다. 클래식에 바흐와 모차르트가 있다면 팝음악에는 비틀스가 그런 존재이죠. 팝음악의 기초를 다져놓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밴드를 할 수 있게 한 사람입니다.”
한국 비틀스 헌정밴드인 맨틀스에서 존 역할을 하는 김준홍씨가 비틀즈 위대함에 대해 물었을 때 답한 대목이다.
비틀스 취재팀이 영국으로 본격적인 취재를 떠나기에 앞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지난 시간 주한영국대사관 관계자 만남에 이어서 이번에는 한국의 비틀스 헌정밴드인 맨틀스(Mentles) 멤버들을 만났다.
맨틀스는 신사를 뜻하는 Men과 Beatles의 tles의 합성으로 만든 비틀스를 노래하는 밴드이다. 밴드 구성원은 30∼50대 직장인들이다. 2008년에 결성됐고 2집 앨범까지 낸 밴드이다. 비틀스 구성원들처럼 네 명인데 각자 역할이 있다. 김준홍씨는 존 레논, 박승혁씨는 폴 매카트니, 손보성씨는 조지 해리슨, 장석원씨는 링고 스타 역을 소화한다. 각각 ‘존’ ‘폴’ ‘조지’ ‘링고’ 로 부른다. 비틀즈처럼 옷을 차려 입고, 비틀즈처럼 노래한다. 팬에 머물지 않고 밴드를 결성해서 공연까지 하다니 이들이야말로 비틀 마니아들이다.
공연 준비가 한창인 마포에 있는 한 아트홀에서 그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로그램 콘셉트가 학생들이 비틀스를 탐구하는 여행이니만큼 학생들이 진정으로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리포터 역할을 주문했다. 다음은 탈북학생들과 맨틀스 구성원들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취재진: 북한에서 팝송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노래도 마찬가집니다. 그냥 북한에서 혁명적인 노래만 듣다가 대한민국에 와서 한국 노래도 듣고 비틀즈라는 그룹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 제가 아는 비틀스는 ‘노래 잘하는 영국그룹이다.’ 정도인데 어떻게 비틀즈 매력에 빠지셨나요?
김준홍(존 역할): 비틀스 음악은 ‘이념을 초월해서, 빈부격차를 초월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비틀즈 밴드 활동을 계속 하게 되었죠. 자주 들어서 싫증나는 음악이 있을 수 있는데 비틀스 음악은 연주하면 연주할수록 매력에 빠지는 음악입니다. 처음에는 연주는 안하고 듣기만 했었는데, 나도 한번 연주를 해봐야겠다. 생각했고, 연주해 보니까 재미가 있어요. 근데 듣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들을 때는 쉽게 연주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연주를 직접 해보니까 무척 어려웠습니다. 어려서부터 비틀즈 음악을 듣고 자랐는데 아직도 좋아요. 싫증이 나지 않는 음악이 비틀즈 음악입니다.
취재진: 네명의 구성원들은 예전에 알던 분들인가요?
김준홍: 예전부터 알던 친구도 있고, 같이 밴드 활동하던 친구도 있고, 아니면 녹음을 하기 위해 합류한 친구도 있습니다. 맨틀스(Mentles)는 2008년도에 결성됐어요. 우리나라에서 비틀즈를 추종하는 밴드가 그 전에 ‘애플스’도 있었고 ‘더 원’도 있었습니다. 비틀즈 헌정 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2년부터입니다. 맨틀스는 2008년도에 비틀스 트리뷰트 앨범을 만들면서 결성,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도에 “For no one”를 타이틀로 앨범을 냈고, 2011년 4월에 ‘Now Here 맨틀스’라고 “No Where a Man” 단어를 붙이고 늘려서 “Now Here 맨틀스”라고 2집 앨범을 냈습니다.
손보성씨(조지 해리슨 역): 저는 처음 2002년도에 다른 구성원이랑 관객으로 갔었어요. 근데 이렇게 같이 연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팬의 레벨이 다양하거든요, 저희는 이제 비틀스마니아, 광팬, 오타쿠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준홍: 오타쿠라기 보다는 비틀스 전문 연주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재진: 비틀스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김준홍: 비틀즈 광팬은 세계적인 현상이었어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한번 매력에 빠지면 깊이 좋아하게 되는 마력이 있어요.
손보성: 종교를 탄압하듯 비틀스를 탄압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죠. 진짜 못 듣게 했거든요. 구소련에서요. 자유를 찾아가고 평화를 노래하는 그런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요.
취재진: 비틀즈 음악 어떤 부분에서 자유나 평화 이미지가 있나요?
김준홍: Revolution이라든가, ‘거의 다’ 라고 볼 있죠. 초기에는 사랑노래가 많았고, 중후기로 가면서 철학적인, 정치적인 가사들이 많이 나오죠. 비틀즈가 해체되고 나서는 존 레논이 발표한 ‘Imagine’은 그 정점이라고 할 수 있죠. 폴보다는 존 쪽이 그런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죠.
취재진: 영국에서 공연도 하셨다고요?
김준홍: 지난해 2012년도 리버풀 비엔날레, 미술전시회였는데, 음악과 미술이 융합된 그런 비엔날레였는데 리버풀 현지 무대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취재진: 현장에 갔었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요? 예전부터 비틀즈의 오타쿠로서 그들이 태어나고 노래했던 현장에 간 느낌은?
손보성: 성지순례를 간 기분이었죠. 비틀스 팀 만들면서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점점 더 잘하게 되고 상황이 더 좋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리버풀에 가고 너무 좋으니까 이성을 상실하는 증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준홍: 돌아와서 애들이 정신을 못 차렸어요.(다 같이 웃음)
취재진 : 그럴만도 한 게 저도 여기 와서 비틀스를 알았는데 이제 비틀스 고향에 간다고 하니까 벌써부터 설렙니다.
김준홍: 비틀즈 팬들인가요?
취재진: 비틀즈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김준홍: 비틀스를 알아 가면 알수록 점점 그 매력에 빠지실 겁니다.
취재진: 처음에는 <Let It Be>라는 곡에 매력을 느꼈는데 비틀즈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서 요즘 새로 알게 된 곡은 ‘Hey Jude“라는 노래에 점점 빠져들고 있습니다.
손보성: 비틀스 연구자들이 세계에 많이 계십니다. 비틀스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싶으면 리버풀에 가면 팝유니버시티 1년 과정, 비틀즈 과정을 추천합니다. 저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리버풀호프대학교에 '비틀즈, 대중가요와 사회학' 이라는 비틀스 석사 과정이 있습니다.
취재진: 저는 지금 간호공부를 하고 있고요, 제가 비틀스를 좋아하게 된 배경은 <In My Life> 노래랑, <Yesterday>, 그리고 <Let It Be> 저는 구성원들보다는 가사들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혹시 그런 마음으로 접해 보신 적도 있으세요?
김준홍: 그럼요. 비틀스 노래를 부르는 자세가 가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곡을 썼겠다.’라고 충분히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가사내용을 더 알게 되고 몰입하게 됩니다.
손보성: 가사 중에 그렇게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가사도 있지만 숨은 뜻을 품은 가사들도 많아요.
취재진: 저는 비틀스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경우에요. 탈북 과정에 상하이에 있으면서 영어를 배워야 했고, 영어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비틀스를 접하면서 와 닿는 게 많았습니다. 제가 제일 궁금한 것은 나이가 다 많으신 분들인데, 바쁘실 거잖아요. 가정도 있으실 거고 직장도 다니시고, 어떻게 이런 밴드 활동이 가능하신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김준홍: 우리나라에 이런 독특한 밴드는 없다고 생각해요, 서로 희생을 많이 해요. 상처도 많이 주고....... 비틀스 처럼요.
취재진: 리버풀가면 꼭 가보라고 추천해 주실 곳이 있다면요?
손보성: 스토우베리 필즈, 페니레인, 캐번클럽을 가보세요. 상점도 많으니 돈도 많이 가져 가시구요. (모두 웃음)
취재진: 비틀스 헌정밴드가 말하는 비틀즈의 위대성은 무엇입니까?
김준홍: 비틀스는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영향을 받았느냐가 다릅니다. 비틀즈의 음악은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 팝음악에 비틀즈 DNA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틀스는 위대하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클래식에 바흐와 모차르트가 있다고 하면 팝음악에는 비틀스가 그런 존재입니다.
팝아티스트를 좋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밴드까지 만들어 활동한다는 맨틀스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자라왔는지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아마 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들었던 곡은 1930년대 우리 전통가요들이다. 통신병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오신 아버지가 거의 매일 하루 종일 틀어놓았던 곡들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정말 봄바람에 치마가 휘날리는 것 같은 멜로디인 <봄날은 간다>에 이어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 금사향이 부른 곡들, ‘별들이 소근 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 하는 <홍콩아가씨>, ‘뷔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 되는 별 그림자.......중략....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하는 <샌프란시스코>, 이 노래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골든게이트교가 금문교라는 걸 알았고. 아버지가 매일 녹음테입을 크게 틀어놓고 즐겨들으니 듣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들렸고 멜로디를 따라하게 되었고 지금도 흥얼흥얼 대는 곡들이다. 근데 왜 남자가수들이 부른 곡들은 기억아 안 나는 건지. 어린 시절에 들었던 노래들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을 노래한 <보릿고개>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수 진성씨는 며칠 전에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금쪽상담소에 나와서 어린 시절 노래 불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서너살때 부모로부터 버려져서 친척집을 옮겨 다녔다고 한다. 밥을 먹어야 했고 그래서 노래를 시키면 밥을 얻어먹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린나이임에도 노래를 시키면 불렀다. 그리고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신곡이 나오면 바로 그날 밤에 가사를 외우고 멜로디를 익혀서 다음날 그 노래를 완벽하게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그런 꿈이 있었기에 어려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또 한 케이블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만 13세의 나이로 결승전에 진출해서 최종 5위를 한 정동원, 그의 음악 선생님도 할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조부모에게 맡겨졌는데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할아버지가 부르는 옛 가요들을 저절로 따라 부르게 되었고 그 바탕이 그를 오늘의 트롯가수로 있게 한 비결인 셈이었다. 어떻게 저리 어린 나이에 한이 베인 곡들을 그리 잘 표현하는지 신기할 정도인데 할아버지가 음악 선생이었기 때문이리라.물론 진성씨나 정동원 모두 어느 정도는 음악적인 재능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내가 팝송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작은 오빠가 테이프 하나를 갖다 주었는데 그 테이프에는 이런 노래들이 실려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도박꾼’ 이라고 말하는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라든지, ‘왜 태양은 빛나는지 왜 바다는 밀려오는지’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멜로디 <The end of the World> 같은 곡, 나는 노래를 열심히 들으면서 가사도 번역해 보곤 했다. 이런 팝송을 미리 알았더라면 고등학교 일학년 때 어이없는 오해는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남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는 여고였다. 아마 졸업앨범 뒷면에 수록된 주소록을 보고 보낸 편지인데 ‘만나자’는 편지였다. 그때 나는 오직 공부해서 대학가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서 만나자’고 답장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 편지에 그동안 자기는 나에 대해 ‘Crazy Love’를 했다는 것이다. ‘미친 사랑’, ‘Crazy’란 단어가 형용사 ‘미친’ 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미친사랑으로 번역했다. 그 사랑은 ‘미친 사랑’이 아닌 ‘서글픈 사랑’이라는 의미는 먼 훗날 팝송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는.
많은 음악을 즐겨 듣고 따라했지만 마니아나 오타쿠는 되지 못한 나, 이제 비틀스를 알아가고 있다.
언젠가 나도 비틀스의 마니아가 되어 있지 않을까?
일단 비명 지르는 연습부터 해야 하나 캬아약~
너무 늦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