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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화 Jul 17. 2022

그들은 왜 영국으로 갔을까?

북한을 탈출해 영국으로 간 사람들

  날씨 좋은 일요일 한낮 런던 뉴몰든 지역 한 공원(레인지 파크)에서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들은 축구를 하고 아이들은 뛰어놀고 가족들은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북한을 탈출해 긴 여정 끝에 영국에 발을 디딘 재영 탈북인들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RFA(미국자유아시아방송)방송을 통해 북한을 탈출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듣고 있었다. 이번 탈북청년들과 영국에 온 만큼 그들을 만나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한 상태였다. 

  

  그들은 북한을 탈출해 왜 대한민국이 아닌 영국을 정착지로 택했을까?

  2011년에 출간된 조해진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나다>에서 주인공 로기완 역시 북한을 탈출해 연변에서 노래방에서 일하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그 보상금을 중개인에게 건네고 유럽에 중립국인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적지는 영국이었다. 또한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도 청진이 고향인 바리는 북한을 나온 후 중국을 거쳐 밀항으로 런던까지 갔다.  

  

  유럽에서도 특히 영국에 탈북자들이 많은 이유, 그리고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공원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분을 찾았는데 그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 있는 탈북청년 세 명과 비틀스 여행을 위해 이곳 영국에 왔으며 한국에 정착한 젊은이들과 영국 런던에 정착한 젊은이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과 또 런던에 사는 탈북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소개를 하며 대화를 시도했으나 역시 인터뷰에 쉽게 응해 주지 않았다. 축구가 거의 끝날 무렵 겨우 인터뷰를 진행 할 수 있었다. 자유유럽조선총연합회 김00 사무총장이었다. 그의 첫 일성은 한국에 있는 탈북자보다 해외에 있는 탈북자들이 더 보수적이라면서 이해를 구했다. 자유유럽조선총연합회는 유럽에 있는 탈북자들의 친목과 단합을 위해서 활동하고 더 나아가 북한의 인권 개선과 북한의 사회 개혁을 위해서 활동을 하는 단체라고 소개했다. 


  유럽에는 얼마나 많은 탈북인들이 사는 지도 궁금했는데 그는 “영국은 통계시스템이 잘되어 있어 대략 알 수 있지만 다른 국가들은 비자를 받았거나 아직도 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 약 천 여명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고 그 가운데 영국에는 현재 약 6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 정착한 분들은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가 있는지도 듣고 싶었는데 그는 “경제적인 성공, 일확천금을 벌었다거나 그런 의미의 성공이 아니고 안정적인 직업과 자기 사업처가 있으면 그게 가장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현재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분이 10분 정도 있고 거의 8~90%는 취업을 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제일 궁금한 것은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대부분 대한민국으로 오는데 왜 이 먼 곳인 영국까지 왔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 해답은 그들이 북한에서 받았던 교육에 있었다. “영국은 북한에서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중국을 넘어서 쉽게 올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중국, 동남아, 중앙아시아 등 여러 지역을 거쳐야 오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영국을 택하게 된 계기는 북한에서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한국과 미국, 일본을 주적, 즉 적국으로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 국가에서 거주하는 탈북인들의 가족이 북한에서 받는 피해와 유럽에서 거주하는 탈북인들 가족들의 피해가 다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사나 안녕이 염려가 되서 유럽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의 교육이 남한에 적대적으로 교육을 시켜왔기 때문에, 남한은 왠지 싫다는 생각이 있어서 남한 행을 선택하지 않고 유럽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영국에서 탈북인들의 생활이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탈북인들에게 살 집인 임대아파트를 주고 정착금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영국에서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점이 크게 달랐다. 이 실업수당은 탈북인들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영국 시민권자에 한해서는 누구나 그런 복지 혜택이 받는다고 했다. 실업수당은 직업을 찾기 전까지 국가가 그 사람의 생계를 최소한 책임져 주는 혜택이라고 했다.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정해진 건 아니고 빨리 직업을 찾으면 취업과 동시에 수당은 정지된다고 했다. 사람마다 적응하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오래 걸리는 분들은 오래 지원해주기에 합당하다고 판단이 되면 계속 지급이 된다고 했다.

   

  영국에 정착한 탈북인들은 매주 일요일마나 이곳 크로메리 파크 작은 공원에 모여 교류를 하고 있다. 런던에 다른 공원들에는 영국 시민들이 와서 놀지만 이 공원만큼은 North korean만 주말마다 와서 축구를 하는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사무총장의 말이다.

   “특별히 영국 정부에서 배정한 곳은 아니고 우리가 주말마다 이 공원에서 6년 간 전문적으로 축구를 하다 보니까 지역 주민들이 일요일만은 ‘이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구나’ 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내 주다 보니까 저희 주말 전용 공원이 됐습니다.”

  매주마다 20~30명 정도가 모여서 축구도 하고 영국에서의 교류도 한다고 했다.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일요일이면 대부분의 한인들은 한인교회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것을 봤다. 점심도 교회에서 해결하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서 봉사를 했다. 예를 들어 평일에 미용실에 근무하는 분들은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머리를 손질해 주고 그 비용은 해외 선교 사업에 쓰였다. 우리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미용실 헤어손질비용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건 이 한인교회에서 해결하곤 했다. 이를 이민신앙이라고 했다. 이민 온 사람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교류하면서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다. 미국에서의 한인교회는 한인들의 집합장소였다. 이곳 영국에 정착한 탈북인들은 이곳 공원이 그들이 함께 소통하는 공간이고 낫선 이국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는 공간이었다.

   

  영국에 있는 탈북인들은 이곳 공원에 모여 정보도 교환하고 소통도 하고 있는데 조선인 연합회가 영국 정부에 공식적인 단체 등록도 마쳤다. 낫선땅에 정착하려면 도움받아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더구나 언억 다르니 처음부터 얼마나 어려움이 맣겠는가 이런 점을 단체가 나서 도움을 주고 있다..

  “영국은 원래 어느 사회단체나 소수계층들이 단체를 묶어서 서로 활동을 하고 친목을 다지고 하는 건 자유에요. 국가에서 통제는 안하는데, 그 자유로운 활동 중에서도 국가가 인정을 해주는 활동들이 있거든요. 그게 국가에 등록을 해서 ‘우리는 이제부터 이런 활동을 하겠습니다’라고 신고를 하는 건데요, 작년에 저희가 charity 자선단체에 등록을 해서 공식적으로 저희가 하고 있는 모든 활동들이 국가적으로 인정이 되면 그런 활동들이 되는 거죠.” 재영탈북인연합회에서는 탈북인들의 영국 정착을 위해서 이렇게 친목도모를 위해서 축구도 하지만 영국에 정착하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서로 도와가며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무총장의 말이다.

  “한 개인이나 사회단체가 또는 어떤 특정 집단이 한 국가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도움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거, 교육, 취업, 의료, 언어 그리고 영국 같은 경우에는 외국이다보니까 통번역서비스 이런 것들이 필요하거든요. 근데 저희들이 취업을 직접 시켜주는 건 아니지만 좋은 취업 정보들이 있다면 서로 공유를 하고, 그리고 의료서비스나 이런 것들이 누가 어디 가서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았다고 하면 나는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잖아요.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 공유하면서 서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면서 서로 공조하면서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그런 시스템으로 같이 하고 있구요. 젊은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영국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언어 장벽을 극복을 하는데, 특히 나이 많으신 분들 같은 경우에는 힘들어요. 그래서 그분들을 위해서 통번역 서비스를 도와 드립니다. 국가기관의 서류들을 보거나 거기에 대처를 해야 될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거든요. 하다못해 전기세를 내야 한다든지, 수도세를 내야한다거나, 가스비를 내야한다거나 아니면 구청에서 공지가 왔다거나 하면 전혀 읽어볼 수가 없는데 그런 부분을 우리가 서포트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사무총장의 영국 생활은 어떠할까?

 “북한에 비교하면 영국은 하늘과 땅, 지옥과 천국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논리를 피해서 북한주민의 순수한 입담으로 얘기를 하자면, 여기가 바로 ‘북한에서 말하는 공산주의 사회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 복지 시스템이 정말 잘 되어 있어요.”

 

  영국에서 한반도를 지켜보면 그는 두 나라 모두 잘 되기를 바랐다.

  “북이 잘했던, 남이 잘했던지 간에, 그리고 북이 못했던 남이 못했던지 간에 우리 조국의 문제잖아요.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두 국가 다 잘 됐으면 좋겠죠. 잘 되서 우리 소원인 통일을 빨리 이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이념이 다른 만큼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는 방향으로 한반도가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회장님께 부탁해서 축구에 참여했던 젊은 청년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곱 살 때 탈북해 한국에서 정착해 스물두 살까지 살다가 대학을 휴학하고 영어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 온 청년을 먼저 만났다. 그는 재영 탈북인 가운데 어머님이 아는 분이 계셔서 런던시내에 살지만 일요일에 이곳에서 같이 교류하며 지낸다고 했다. 북한에서 알던 삼촌이 이곳 영국에 정착했다. 엄마는 한국에 정착했고 삼촌은 영국에 정착해 사니 참 지구촌이 하나다.

  그의 대답이다.

“일단은 참 좋은 거 같아요. 여기서 나와서 혼자서 뿔뿔히 흩어져 지내는 것보다 모여서 서로서로 도우면서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했다. “북한에서 온 형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인정이 많아요. 어떻게 보면 남남인데 서로 도와주려하는 부분이 좋은 거 같아요.” 

  마침 함께 갔던 탈북청년과 북한에서의 고향이 같은 청년과도 만났다. 나는 북에서 온 청년들끼리 대화를 나눠보도록 했다.

  서울 김: 저는 지금 서울에서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고 북한에서 2006년에 나왔어요.

 런던 김: 저는 2007년에 런던에 왔어요. 

 서울 김: 전공이 뭐에요?

 런던 김: 저는 엔지니어 공부를 하고 있어요.

 서울 김: 그러면 영국에서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들은 뭐가 있어요? 그리고 어떻게 극복했어요?

 런던 김: 당연히 어려운 점은 영어죠. 근데 열심히 해서 그걸 극복했어요. 하루에 단어를 30개를 외우고 문장을 10개를 외웠어요. 그러면서 하루를 제가 스스로 테스트 하는 거죠. 이걸 외웠으면 다음 날에는 단어 30개 이렇게 하구요. 이렇게 일 년을 하다보니까 단어를 만개 외웠어요. 그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서울 김: 여기서 지도를 해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런던 김: 네 저희 아빠예요. 저희 아버지가 모든 걸 다 해주셨어요. 아버지가 안해주셨으면 이렇게 안됐을거같아요. 안그랬으면 그냥 띵가띵가 놀았을텐데 아빠가 그렇게 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서울 김: 지금 장벽은 없겠네요?

  런던 김: 언어장벽은 이제 없어요. 영국애들이랑 항상 대화하고 오히려 한국말을 까먹어서 한국말이 엉망이 예요. 그래서 집에서 한극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서울 김: 저는 아직도 영어가 부족한데, 영어를 한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 같아요. 그럼 꿈은 뭐에요?

  런던 김: 저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차를 수리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요.

  서울 김: 축구 좋아해요?

  런던 김: 네 잘 못하는데 열심 포지션은 수비를 많이 봐요. 축구선수 호날두를 좋아해요.

  서울 김: 영국에서 축구경기도 구경가고 그러나요? 

  런던 김: 가끔 친구들이랑 용돈으로 가고 그래요

  

  영국에 오니까 이전 북한이나 중국에 있을 때 보다 뭐가 좋은지 물었을 때 그는 너무 어렸을 때 북한을 나와 중국에서 생활하다 영국으로 왔고 영국에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보니까 옛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북한을 나와 중국에서 살다가 지금은 영국에서 젊음을 맞이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는 딱히 대답을 못했다. 한국에 있는 또래 탈북청년들에게는 “그냥 힘내라고만 말하고 싶어요. 나중에 좋은 사람 되서 만나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영국에서 한국의 걸그룹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k-pop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단 언어가 통하니까 좋다’고 했다. 지금은 외국에서도 k-pop열풍으로 한국어 배우기가 붐을 일으키고 있느니 그들이 한국어라는 같은 언어를 쓰다는 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친구들이 그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알지만 북한에서 왔다고 특별히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친구로 생각하지 어디서 왔다는 background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차별을 염두에 둔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창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마쳤다.

  “My name is Kevin Kim. I want to be a mechanic. I wanna be a famous mechanic in UK.”

  그의 꿈이 이뤄지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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