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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Dec 03. 2020

나의 살던 고향은

감정 들여다 보기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하게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직장의 어떤 사람에게서 동네 어르신이 연상되고, 서울의 골목길에서 동네 담벼락이 떠오르기도 한다. 옛 물건을 전시한 박물관의 어떤 물건은 동네의 담뱃 가게와 주름 쪼글 했던 할머니(할매)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어린 기억은 치유 능력도 있다. 일상에서 생긴 걱정으로 우울할 , 추억 하나를 꺼내 떠올려 보면 금새 위로가 된다. 예를 들어, 개울가에서 잔뜩 잡아 놓은 피라미들이나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논과 그위에 놓여진 썰매, 마대자루 한 자루를 가득 채운 네모난 딱지같은 것들, 이런 기억으로 오는 감정들은 늘 옳았던 것 같다. '걱정 마, 너도 행복한 때가 있었잖아'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위로하는 것 같다.





작년 김은성 님의 <내 어머니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었다. 이 책은 작가가 늙은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들었던 내용을 어머니의 자서전처럼 엮어 놓은 책이다. 그중 책의 전반부에 작가의 어머니 고향 지도를 손그림으로 그려놓은 부분이 있었다. 아늑하게 만화로 그려낸 그 페이지를 보는 순간 나는 정겨움들이 느껴졌고, 이내 나도 내가 자란 마을 지도를 그렸었다. 그때의 노트를 뒤적이다 오늘 눈에 딱 들어왔다.  

내가 자랐던 고향의 약도 (경주시 내남면...)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곳저곳 훑어보았다. 이 시골 동네에서 특히 나를 즐겁게 했던 몇 곳이 보인다. 먼저 아이들과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고, 축구도 했던 '창고 마당'이다. 아이들에게 허용된 가장 큰 공터이자 핫플레이스였다.  아래쪽에는 여름에는 워터파크, 겨울에는 빙상장, 썰매장이 되어준 형산강(큰 그랑이라 불렀었다)이 있다. 형산강과 합류하는 마을의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이 곳은 혼자 놀기 딱 좋은 놀이터였기도 했다. 어디가 물고기가 많고 잘 잡히는 포인트인지, 수풀의 모양, 큰 돌의 위치까지 훤히 꿰차고 있었다.


마을 중간에는 가로로 관통하는 2차선 도로가 있다. 기억에 초등학교 2학년까지 먼지 뽀얗게 날리는 비포장도로였었다. 이후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차도 많아지고 빨라져서 조심해야 한다는 엄마의 당부가 기억난다. 실제 몇몇 들이 교통사고가 났다. 그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지도상 좌측) 가면 경주 시내가 나오고, 남쪽(지도 우측)으로 가면 더 깊은 시골 마을로 향하게 된다. 이 도로는 마치 도시와 시골을 잇는 상징이었다.


사과밭 과수원이 세 군데 있었다. 모두 주인장들이 꼬장꼬장해서, 사과 하나 그냥 먹기 무서웠다. 그중 한 곳은 대나무 울타리였는데, 사과 대신에 나는 그 대나무를 잘라 낚싯대로 쓰곤 했다.
우리 집은 동네 중심부에 위치했다. 지도를 그렇게 그린 게 아니라 정말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마을에 1시간 간격으로 시내버스가 다녔는데, 우리 집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나는 그것도 자랑스러웠다. 우리 집을 거쳐야 버스를 탈 수 있었으니까.


중학교 2학년이 되며, 이 마을을 떠났다. 시내에 있는 학교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후 나는 시내에 위치한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에서 나머지 성장기를 보냈다.

고향에 가면 가끔 어린 시절의 그 동네를 지나간다. 그러면 유심히 살피고, 저절로 머금은 미소로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아들~, 저기가 아빠가 놀던 개울가야. 여기는 창고 마당이고, 저기 큰 그랑도 있네."

물론 내가 제일 즐겁다.

김은성 님의 <나의 어머니 이야기> 중에서

어른이 되면 슬픈 일이 많다. 무거운 것들도 많다. 아이를 키워내는 일이 그러하고, 다 클 때까지 버텨내며 직장 다니는 일도 그렇다. 어느 순간 부모님의 노쇠가 눈에 들어오고, 이렇게 늘어가는 내 주름도 눈에 거슬린다.

'나이 들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라고 한다. 책임과 의무의 굴레가 늘 따라다니는 '어른 사람'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풀어내는 어린 시절 기억이 고맙다. 마치 곳간이 가득 찬 처럼 푸근했고,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의 봄날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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