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독식 정치에 질문을 던진다
갈등과 혐오의 시대를 풀어가는 제언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첨예한 갈등과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다. 사실 정치가 사회를 안정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회를 갈갈이 분열시키고 있다. 지역, 세대. 성별...등으로 끝없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 찢어진 상처와 혼란을 먹이로 기생하는 특정 세력 외에는 대부분이 희생자가 되는 세태다. 무언가를 위해 상대를 비난하고 목소리 높여 외쳤지만 사회적인 희망을 키우지 못하고 어느 날 돌아보면 그늘에 남겨진 허망한 모습의 다수는 희생자다.
경쟁의 시대 회자되는 단어 중 하나가 승자독식이다. 빈번히 쓰이기에 승자독식에 어떤 이의를 달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마저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단어로 견고하게 자리 잡아가는 모습이다. 관념적인 한 단어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며 이상한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사례가 있을 텐데 승자독식도 그 한 예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과연 승자독식은 거부감 없이 우리 의식에 스며들고 그대로 수용해야 할 절대 선 혹은 그 유사한 가치를 가진 단어인가?
경쟁이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승자독식을 언급하곤 하는데 내용을 보면 1위가 독식하는 구조는 아니다. 어느 업계에도 복수의 회사가 다양한 특장점을 가지고 존재하며 각각의 지분을 갖고 경쟁한다. 스마트폰에서 애플이 절대 강자지만 애플만의 생태계는 전혀 불가능하다. 애플이 선도적으로 열어간 스마트폰 생태계 안에서 삼성 반도체나 삼성 갤럭시 폰도 더욱 성장했고 다양한 업체들이 그 시장을 키워가고 있으며 한 바퀴 돌면 애플도 그 수혜자가 된다.
스포츠에서도 승자독식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기실 어느 스포츠에서도 승자독식은 없다. 물론 1위가 각광을 받고 더 큰 영예를 누리지만 2위나 3위 혹은 그 이하에게도 적절한 응원과 지분이 따른다. 우리 선수들이 맹활약하는 골프에서도 보면 1위의 상금이 100이라면 2위도 약 50 정도는 된다. 다른 참가 선수들에게도 일정 부분 보상이 따른다. 우승이 전혀 없어도 꾸준히 중위권을 유지하며 세계 랭킹 순위나 상금순위가 높은 선수도 있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스윙 자세가 너무 좋아 팬이 많고 광고 섭외에서 앞서는 선수도 있다. 승자는 패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패자가 있기에 승자가 있는 그것이 스포츠다.
유독 승자독식이 제대로 횡포를 부리는 곳이 있다면 작금의 정치다. 수천만 표에서 한 표라도 더 가져가면 모든 권력의 주요 자리를 다 차지한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주요 결정을 뒤집어도 된다. 최근 대선을 보면 0.67% 차이로 승리한 측이 완벽한 승자독식을 즐기는 모습이다. 언론은 승자독식이란 표현을 통해 그래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리더의 사회통합 철학이나 균형과 탕평의 가치 아래 일정 부분 상대를 배려하는 포용력이 있었으나 이제는 철저히 그리고 뻔뻔하게 무시되고 있다. 승자독식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아집과 뻔뻔함은 당연함으로 대체된다.
승자독식의 폐해는 비단 결과만이 아닌 과정상의 혼탁을 야기한다. 그 깃발 아래 선거는 사활을 건 싸움이 되고 온갖 권모술수와 가짜 뉴스가 난무하게 된다. 얼마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검언유착 사건이나 검찰의 대리고발 사주는 그 실체가 모호하지만 어느 한 세력의 전형적인 권모술수다. 승자의 온갖 혐의 또한 유야무야 사라지고 만다. 승자독식 하에서 페어플레이나 정치의 금도라는 절제의 단어는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고 화석이 되었다. 사회통합이란 미사여구도 내편을 도와주고 확장하려는 교묘한 술책의 언어로 전락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은 정치로 수렴하는 시대다. 복잡성이 커지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시대에 사회의 근간인 법과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역할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력이 워낙 크기에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도 정치의 영향력은 줄지 않고 한층 커진다. 정치인의 행동이나 언어가 사회, 경제, 교육 등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올바른 정치리더와 리더십의 역할이 더욱 절실한 시대다. 그런 리더가 미치는 선한 영향력은 가뭄에 단비처럼 다양한 분야에 따뜻하게 스며들고 사회적인 긍정을 키워갈 텐데 현실은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꺾고 있다.
더욱 날 선 승자독식을 보고 있다. 과거보다 더욱 편협한 승자독식, 특정 분야 검찰의 독무대가 되어가는 모습과 권력을 줄 세우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출입국 기록을 조작해 기소하고 공소권 남용으로 징계를 받은 검사도 핵심 공직에 임명한다. 어떤 사적 관계가 있는지 모르나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지율 50%도 넘지 못하고 2위와 불과 0.67%의 차이가 만들어낸 승자독식과 독주의 정치다. 과반 이상의 국민은 통계수치로만 남고 철저히 외면 받아도 좋은가? 일부 극성층에게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겠지만 전체 사회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암울한 퇴행이고 참으로 옹졸한 리더십이다.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 사실 어떤 제도도 완전하지 않기에 리더나 구성원의 의지나 역할이 중요하다. 필리핀에서 악명 높던 독재자의 아들이 최근 대통령에 당선된 사례는 금권과 적절한 가짜 뉴스 그리고 교묘한 프로파간다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 민주주의 방식에 의한 민주주의의 참담한 파괴인데 비단 그 하나뿐일까? 그와 같은 극명함으로 드러나진 않을지라도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거나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대선도 정책보다는 극단적인 혐오와 비호감을 야기하는 주장만 난무하며 퇴행하는 민주주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작금의 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어떻게 사회적 역동성을 살려가며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고 사회통합의 가치를 살려갈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체념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모델로 선거에서 하나의 협치 불문율을 정하고 준수하는 것은 어떨까? 대통령이 임명하는 주요 권력의 자리에 7:3의 협치 불문율을 적용하는 것인데 집권 여당이 7의 몫을 가진다면 야당에 3의 몫을 할애하는 방식이다. 지방자치 선거에서도 같은 룰을 적용한다. 주요 보직의 10중 3은 야당의 몫, 내편 아닌 네 편의 몫이다. 감각적인 비율이지만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3이다. 건강식 잡곡밥도 쌀과 잡곡 7:3이 최적이라 하는데 건강한 협치의 비율로 적절하지 않을까?
그러한 불문율이 작동한다면 사활을 건 이전투구나 권모술수 혹은 팽배하는 가짜 뉴스 문제도 자연스럽게 완화될 수 있으며 국민통합의 길을 구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정치가 사회를 밝게 리드하고 희망을 키워갈 수 있는 단순한 협치의 룰 7:3이다. 불문율이 정착하기까지 필요하다면 토론과 입법을 통해 분명하게 방향과 취지를 제시할 수도 있다.
첨예한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기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유한한 승리 뒤에는 항상 혐오와 갈등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며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한다. 복잡성과 모호성이 날로 더해지는 시대에 절대 선이나 절대 정의는 관념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체적으로는 존재하기 어렵고, 상황과 관점에 따라 악이 되고 불의가 될 수 있기에 그 혐오와 갈등의 악순환은 끝없이 이어진다. 승리 뒤의 달콤함은 짜릿하겠지만 극히 유한하다. 고대 로마에서 개선장군에게 전했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비단 죽음 자체 만이 아닌 상대의 패배나 어느 때 경험할 자신의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승리에서 우쭐하지 않는 겸손에서 다양한 형태의 포용과 통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보면 로마제국의 번성과 영광의 큰 힘은 열림과 포용이었다.
리더 스스로 승자독식에 질문을 던지고 거부하며, 승자독식이 당연하지 않다는 대중의 견고한 사회의식이 있을 때 그것이 사회통합의 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다. 승자독식이란 단어를 남발하는 언론을 경계한다. 설령 비판적인 맥락일지라도 그 단어가 던지는 암묵적인 함의 자체가 부정적이다. 독식을 익숙하게 만든다. 우리가 말을 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말이 역으로 우리를 지배한다. 일상에서 무심히 쓰는 단어 하나에도 때로 신중한 고민과 비판적 수용이 필요한 이유다. 신문을 보다가 눈에 띈 승자독식이 거슬린다. 승자독식을 거부하고 협치의 불문율 7:3 룰을 우리 선거와 우리 민주주의에 담을 수 있을까? 선거 결과는 물론 선거 과정에 과도한 혐오를 조장하지 않고 긍정적인 미래를 위한 하나의 합의 비율, 구호에 머물지 않는 진정한 사회통합의 길을 열어가는 가능성의 힘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