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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산은 Feb 17. 2022

그 빛을 느끼며 생명력을 가늠한다

 말의 빛, 새로운 시간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담는다

바람은 언제나 입구에서 맴돌며 활기가 있다. 골목길에 들어서거나 식당 문을 열고 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외관은 누추하나 맛집으로 알려진 곳, 널찍한 홀이 종영 후의 극장처럼 한산하다. 저녁시간이 좀 늦은 이유도 있지만 코로나로 손님이 많이 줄었음이 온전히 느껴진다. 사장님은 얼마나 힘들까? 영업시간 제한으로 채 한 시간이 남지 않았지만 가장 분주해야 할 즈음인데 손님은 서너 테이블에 불과하다. 중간쯤 자리에 앉은 것은 다른 손님과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어느덧 몸에 밴 반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안경에 뿌옇게 서린 미세한 입자가 온기에 흩어지며 시야가 트인다. 메뉴가 커다랗게 걸린 벽 한편에 깨끗해 보이지만 별 움직임이 없는 주방이 엿보인다. 일행 없이 찾았기에 넉넉히 주문할 수 없음이 괜히 미안하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말투와 목소리가 걸지다. 요즈음엔 낯선 풍경이다. 목소리가 큰 것도 있지만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비속어가 더하는 걸짐이다. 보지 않아도 동작도 클 것이다. 식당에서 말을 자제하고 필요한 이야기도 조용히 나누는 코로나 상황을 모르는 듯 혹은 의도적으로 깨려는 듯 거친 파열음이 툭툭 튀어 오른다. 간헐적이어서 처음엔 못 느꼈는데 갈수록 빈도가 잦다. 술기운이 오르는 모양이다. 밤 9시로 식당 영업이 제한되니 대개는 저녁자리를 일찍 갖고 음주 속도도 빨라진다고 하는데 촌음을 아껴 알뜰하게 마신 모양새다. 맞은편 일행이 그를 자제시키는 것 같은데 잠시 누그러지다 되살아난다. 머플러가 고장이 난 자동차 소음처럼 불규칙하며 탁하고 두드러진다. 보이지 않는 비말이 무성할 것이다. 팬데믹 초기에 많이 나돌던 영상, 연기처럼 비말이 스멀스멀 공간을 점령하는 모습이 스친다. “흠.. 코로나 시대에 매너가 없군.”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해를 넘겨가는 코로나에 무뎌진 마음이거나 2차까지 맞은 백신이 주는 여유일 수 있겠지만 어쩌면 왁자지껄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도 있으리라. 그래 저런 모습이었지! 옆 테이블의 고함 소리와 젓가락 장단에 공간의 흥을 함께 즐기며 음식과 술을 나누던 때가 있었는데 그새 멀게만 느껴진다. 두드러진 목소리가 장마에 불어나는 실개천 물처럼 차오른다. 그가 감염자라면 코로나는 이미 공간에 넉넉히 퍼졌을 것이다. 식당에 들어선 것으로 우연이란 이름의 티켓을 가진 한 배에 탄 몸이 되었다.  벌써 한동안 앉아 있었는데 이제 와서 굳이 거슬릴 이유도 없다. 포기하면 너그러워진다. 카운터에 있는 주인도 비슷한 생각으로 무심히 지켜보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은 이미 코로나 이전의 풍경 ‘응답하라 2018’ 모드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닐까?    


얼추 식사를 마쳐갈 즈음 한 사람이 카운터 앞에서 말한다. “시끄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백신 2차까지 다 맞은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말도 다양한 색과 질감의 빛을 띤다. 초록빛을 따라 눈이 마주친다. 구석 테이블에 앉았던 일행이다. 점잖은 말투의 장년이 홀을 향해 서 있다. 약간 오른 술기운에 어색하지만 용기를 낸 듯하다. 머플러 아저씨는 어디 갔나 싶지만 아무렴 그런 말 건네는 일행이 고맙다. 이미 반은 이해하고 반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괜찮다고 손 들어주며 스치는 미소로 답한다. 예기치 않은 행동에 주인도 가볍게 응수한다. “힘들 때일수록 조금씩 배려하는 것이 좋지요. 고맙습니다.” 계산대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여유를 잠시나마 찾았으리라. 몇 마디 말로 너른 공간이 일순 따뜻해진다.   


말이 주는 느낌이나 힘은 묘하다. 우리가 말을 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작용에서 보면 훨씬 큰 힘으로 말이 우리를 지배한다. 한마디 말에도 칠흑같이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가 되며 밝아진다. 날카롭게 찌르며 아프게 하고 순식간에 치유도 하는 신비한 힘이다. 말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 일견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만큼 긍정적인 것도 없다.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강력한 도구다. 말을 통해 나와 타인의 삶을 훨씬 밝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적절한 한 두 마디 말이면 풀릴 걱정이나 오해와 갈등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나 말을 하지만 그 영향력은 가늠할 수 없이 깊고 넓게 퍼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도 미처 모르는 말이 가진 지렛대 효과다. 그것을 느끼며 사는 삶인가? 풍성한 삶일 것이다. 조용히 흐르는 물의 힘이 커다란 터빈을 돌린다. 그런 힘이 말에도 있다. 말도 물과 같아서 그냥 보면 별 힘없어 보이지만 그 길을 살짝 돌려보면 자체로 다채롭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힘이 있다.


달포 전 아흔을 넘긴 분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풍성한 대화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다. 서른 해 가까운 연배 차이가 있고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분인데, 신기한 것은 어떤 심리적 어색함이나 시간의 격차를 느낄 수 없었다. 편안하고 겸손한 말씀에 간간이 느껴지는 유머감각이 잔잔한 호수의 물 비늘처럼 반짝였다. 자신을 드러내는 칙칙한 말은 조심스레 아끼고 상대를 배려하는 담백한 말은 자연스러웠다. 커다란 연구업적을 쌓고 충분히 자랑하실 만한데도 그런 것들은 담담히 넘기시고 대화에 필요한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설명은 남다른 기억력으로 세세하고 특별했다. 다섯 시간 넘게 많은 대화를 했는데 부정적인 표현을 들은 기억이 없다. 다양한 세상사에 대한 관심과 부담스럽지 않은 호기심도 인상적이었다. 말에서 배어 나오는 그분의 삶, 말의 내용이나 맥락적 흐름 그리고 목소리나 속도의 완급 등에 파스텔화처럼 은은히 스며 있는 풍성함이다. 사람은 누구나 빛을 가지고 있다면 말을 통해 그 빛을 한 줌씩 나눈다.


다시 새해를 맞는다. 새로운 시간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담아 본다면 말이 만들어 내는 빛을 느끼며 그 가능성을 가늠하며 사는 것도 괜찮으리라.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느낌 좋은 대화를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험하고 파편화된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지만 좋은 말의 힘은 여전하고 오히려 더욱 소중하다. 내가 하는 말에서 나와의 대화에서 누군가 그런 풍성함이나 어떤 빛을 느낄 수 있을까?

하얀 솜털 씨앗이 창밖에서 가볍게 흩어져 날아간다. 조팝나무 담장 위에서 겨우내 마른 꼬투리 하나가 햇살과 바람에 터졌나 보다. 사람의 말도 저렇게 퍼져 흩어지며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 움직임이나 영향력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말이든 첫 모습은 내가 다듬고 결정할 수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말에 생명과 빛을 불어넣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 빛을 느끼며 생명력을 가늠하며 사는 삶을 꿈꾼다. 말이 그려가는 말의 작품, 그것이 삶이 아닐까?



2021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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