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를 읽고
9/10/50
아무 규칙성 없는 이 세 숫자는 지난 25년간 내가 경험한 나라들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9년이라는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고 10개국을 돌아다녔으며 50여 개의 도시에서 거주하거나 방문하였다. 이 중 1년 이상 머물며 그 나라와 도시에 일원이 되었던 적도 있으며 하루 이틀만 머물며 잠시 방문자로 스쳐 지나갔던 곳도 있다. 타인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에 도착하고 원치 않게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접했던 어린 날의 나는 어느덧 그러한 경험들이 좋아 자발적으로 그들의 땅과 문화에 다가가는 취미가 생겼고 그렇게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여행을 통해 뭔가 소중한 것을 얻어 돌아와야 한다는 관념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다.
-여행의 이유 中 (28페이지)-
그렇게 내 일부가 되어버린 여행은 나에게 꽤 큰 질문을 하나 던져주었다. 나는 매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혼자 그 여행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이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들이 있을 까?'라는 질문을 했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여행을 통해 지불했던 시간과 돈으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어느새 나는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마치 여행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그 질문은 뒤로한 채 다른 여행지로 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군 복무로 인해 여행을 하기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생긴 지금 실제로 많은 여행을 다닐 때보다도 오히려 더 많이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런 나의 고민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 흥미를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김영하 작가가 '여행 선배'로서 먼저 생각하고 정리해 놓은 이 글은 내가 몰랐던 나 스스로가 여행을 즐기는 이유 그리고 내가 왜 계속해서 여행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조심스럽지만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그러다 문득 자신의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中(70페이지)-
나는 어려서부터 세상 그리고 인생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누구인지도 궁금했고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궁금했다. 누구나 그렇듯 이번 생은 처음이기에,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앞으로 경험한 일들을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 채 하루하루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불확실한 미래 가운데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기대를 하기도 한다.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일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그리고 그 감정들은 우리의 삶에 나지막이 내려앉아 우리의 인생과 동행하게 된다. 여행도 우리 인생과 같다. 앞으로 이루어질 우리의 기나긴 인생에 대해서 알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가 새롭게 떠날 그 여행지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품고 짐을 꾸린다. 여행은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하더라도 그 모든 상황을 전부 통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때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김영하 작가가 <추방과 멀미>의 챕터에서 말한 상해로의 여행은 하루 만에 비자가 없어서 추방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이러한 경험은 작가가 계획한 일이 아니며 그것은 작가에게 당혹스러움과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신선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의 경험은 결국에는 이렇게 그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 이렇게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등장을 했고 그 여행의 목적이었던 소설 집필도 한국에서 잘 마무리되어 성공적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추방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가 그의 여행 자체를 마냥 얻은 것이 없는 부정적인 여행으로는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짧은 '추방'의 경험은 다시 한번 여행의 예외성에 대해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은 그가 인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우리 인생의 단편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을 통해 경험했던 좌절의 순간과 당혹의 순간은 그 뒤에 올 새로운 경험으로 인한 즐거움의 순간과 배움의 순간 또한 알게 해 준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인생에 대하여 짧지만 강렬하게 학습된 우리는 우리가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 좌절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처음 접해보는 낯섦에 두려울 때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용기와 기대를 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힘들 때 인생을 살아갈 힘을 허락하고 동시에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게까지 해준다. 그것이 내가 발견한 첫 번째 여행의 이유였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의 이유 中(106페이지)-
김영하 작가는 여행을 가면 호텔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호텔에는 자신의 아픈 기억과 슬픈 추억들을 머금고 있는 물건들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런 슬픈 기억들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자신을 해방해시켜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낯선 곳에서 덩그러니 혼자 있다 보면 그곳의 현재 풍경과 분위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발생했던 일들로 인한 탄식과 미래에 있을 불안감으로 인해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여행은, 특히 한 달 이상 떠나는 여행은 우리를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나오게 하여 우리가 그곳에서 매일매일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광경과 순간에 몰입하게 한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순간순간에 모든 오감을 동원하여 몰입하는 그 경험. 그 경험이 우리가 현재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그것은 과거의 '나', 그리고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가 아닌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즐기고 있는 이 상황을 통해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함을 느끼는지 '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 주며 내가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 몰입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있어 과거의 '나'도 나이고 미래의 '나'도 나이지만 정작 실제로 이 세상 속에 놓여 살아가고 있는 존재는 현재의 나일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복은 미래에 있지도 않고 과거에 있지도 않으며 현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추억을 통해 과거에서 행복을 찾거나 현재를 희생함으로써 미래에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 행복은 반복이라고 생각해요... 행복한 사람은 습관이 좋은 사람인 거예요.". 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행복은 습관이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고 습관은 우리의 현재를 이루는 단위이다. 습관이란 미래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금 내가 실천하고 있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것이 때문이다. 그렇게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 충실하게 만들어주며 그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나'를 알아갈 수 있게 해 준다. 현재에 충실하게 해 주며 '나'를 알게 해 주어 행복을 알게 해주는 여행, 그것이 두 번째 여행의 이유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 일뿐이다.
-여행의 이유 中(198페이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싸(다양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처음 접하는 문화 속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대면한다면 한동안은 아싸(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사람들과 장소를 벗어나 새로운 사람과 장소에 도착하면 그 상황을 조심스럽게 파악하기 위해 조금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 사회 가운데 타인이라는 존재는 항상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어찌 보면 우리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그 사회에 익숙한 일원이 아닌 타인으로 다른 사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발현하려는 데 애를 쓰기 마련이다. 나의 지위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한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기에는 내가 새롭게 관계를 맺고 적응해야 할 사람들과 문화가 너무 많아 불가능하고 이 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나 위주의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세상에 둘도 없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노바디의 여행> 챕터의 말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노바디가 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낮추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나와 '다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겸손한 위치에 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 가운데 '나'만 생각했던 우리가 '너'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만드는 여행,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여행은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며, '나'와 '현재'에 집중과 고찰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어찌보면 여행이라는 사소한 행위하나가 이렇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사실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결국 여행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빠른 흐름에 잠식되어가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허락하는 힐링의 순간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기술, 성장, 돈이라는 가치들이 사람들의 성공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 가운데 그런 기준들에서부터 벗어나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주는 전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우리의 영혼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하는 것. 그것이 여행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일상에 지쳐, 세상의 기준에 눌려 힘든 상황에 놓여져 있다면 잠깐 모든 것을 제쳐두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