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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KIM Jan 31. 2021

살아간다는 것

'걷기 예찬'을 읽으며

이처럼 육체의 중요성이 점차로 줄어들면서 인간은 세계관에 상처를 입고 현실에 작용하는 범위가 제한되며 자아의 존재감이 감소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약화된다.
...
자동차 운전자나 대중교통의 이용자들과는 달리 발을 놀려 걷는 사람은 세상 앞에 벌거벗은 존재로 돌아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인간적인 높이에 서 있기에 가장 근원적인 인간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걷기 예찬을 읽고(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매일 밤 걷는 산책로를 혼자 걸어보았다. 

'걷는 행위를 통해서 근원적인 인간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사실 별거 아닌 걷는 행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문장이라고 처음에는 생각이 되었지만 문득 이 사회 가운데에 살아가면서 밤에 여유롭게 산책로를 혼자 걸을 때만큼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편한 것을, 더 빠르게 원하는 사회로 변하면서 우리는 걷는 행위를 시간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했던 건 아닐까? 힘들고 귀찮고 시간이 아까워서 가까운 거리도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거나 차를 운전하거나 요즘에는 전동 킥보드를 통해 다닌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로 인해 우리는 근원적인 인간성을 망각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면서 단순히 걷기 뿐 아니라 우리가 편리성과 효율성을 우상시하면서 귀찮지만 우리의 인간성을 깨닫게 해주는 많은 행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만해도 요리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식(食)을 위한 준비의 단계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고 진짜 말 그대로 먹는 것만 할 줄 안다. 하지만 재료를 구하고 요리를 하는 단계는 어떻게 보면 인간이 정말 오랫동안 가지고 왔던 삶을 살아가는 프로세스 중 하나인데 우리는 분업을 너무나도 해 놓은 나머지 재료를 구하는 일과 요리를 하는 단계를 전문가에게 맞겨버려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시스템을 바꾸어 버렸다. 편리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의(衣)와 주(住)의 단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다른 일들은 다 편리해져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의(衣)와 주(住)도 외주를 맞기 듯 인생에서 크게 신경 안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의식주의 행위들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행위들을 부여해주는 과정일 수 있는 데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으로 바꾸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것 같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래서 나는 오늘 걸으면서 생각했다. 살아가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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