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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팜비치 Mar 15. 2019

포스터물감

타인과 비교하는 삶에 관하여

대학교 1학년, OT장소로 떠나는 버스 안을 기억한다. 서먹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 묘한 긴장감과 들뜸이 섞여있던 공간. 막 입시가 끝난 20살 청춘들에겐 자기 소개를 위한 질문들이 배부되었다. 종이를 받아들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열심히 무언가 적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적어야할 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당신은 무엇의 덕후인가요?"

덕후, 오타쿠의 순화된 표현. “덕”이란 자고로 “팬”보다 열정적이고, “매니아”보다 헌신적인 자들이다. 무언가 하나를 좋아하면 끝장을 보는 친구들이 모인 곳, 그 곳이 나의 과, 신문방송학과였다.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가수, 야구선수, 뮤지컬배우,, 다들 뭐가 그렇게 좋은걸까. 대학생활 내내 열정적인 덕질을 해댔다. 자신의 최애에 대해 떠들어댈 때면 아이들의 눈은 빛나곤 했다. 그들의 그런 순수한 열정과 애정이 나는 항상 부러웠다. 나는 그때까지 그 무엇도 그렇게 까지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주변의 세계가 새롭게 재편되고나면 이래 저래 열등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보다 잘사는 친구, 예쁜 친구, 인기 많은 친구..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를 작아지게 만든 것은 창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친구들이었다. 돈과 외모는 일정 부분 태어날때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사유는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라온 환경이 사고관에 영향을 미치기야 하겠다만) 뭉뚱그러져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예리한 결이 살아있는 생각을 하는 친구들. “창의적이지 못한 것은 죽은 것이다!” 따위의 수업을 4년간 듣는 과에서, 나는 곧잘 작아지곤 했다.

뭐랄까, 그 아이들은 포스터물감으로 그린 포스터 같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렷한, 순도높은 원색으로 거침없이 자신의 붓을 드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수채화물감 같은 느낌이었달까.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배경색 정도로 적절해보이는 흐릿한 채도. 그래서 대충 어디다 칠해도 크게 겉돌지는 않는 듯 했지만, 스스로를 무슨색이라 소개해야할지 항상 어려웠다. 나도 저렇게 명확하고 경쾌한 색이었으면. 뚜렷한 취향과 사상을 가진 아이들을 나는 항상 동경했다.

취향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몇 년간 나의 콤플렉스였다. 물론 좋아하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포스터 물감사이에서 성장한 나는, 어떤 밴드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그들의 음악정 배경과 멤버들의 출생지, 몇집 수록곡들을 줄줄 읊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으면 그냥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 일을. 연분홍도, 꽃분홍도, 핫핑크도, 모두 분홍색인 것을. 이제는 그렇게 밴드를 줄줄 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때면 조금 주저하곤 한다. 이정도면 충분히 선명한 색일까? 스스로를 검열한다.

사회에 나온 뒤론 내가 동경하던 포스터물감같은 아이들이 오히려 그 선명함 때문에 힘들어하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색은 한정되어있는 탓이다. 물에 물탄듯 흐릿한 색으로, 나는 이 사회 한 구석의 배경색을 칠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론 “너 정도면 색이 강하지”라는 평을 듣기도 하면서. 그러나 그 시절 내가 동경했던 그 아이들이 쓴 글이나 근황을 우연히 접할 때면, 여전히 어떤 섬광 같은 것에 내리찍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날이 살아있는 도끼같은 생각으로 이 사회를 내리찍고 뒤틀린 흠을 만들어내기를. 먼 발치에서 조용히 응원한다.

나이가 들고보니 내가 동경했던 것은 어떤 한 개인이 아니라, 일종의 하이라이트 편집본이었던 것 같다. 남들의 가장 멋진 단상들만을 모아 실제론 존재하지않는 허구의 비교대상을 만들고, 그 모든 부분을 충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수채화는 수채화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물을 조금씩만 달리 섞어도 낼 수 있는 색깔은 훨씬 다양하다. 나이가 들고 ‘나로서의 나’에 좀 더 능숙해지며, 내가 낼 수 있는 색에 집중하며 살아가려 한다. 사람은 타고난 색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런 주저함이, 조금 더 지속되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다.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스스로의 선명함에 대한 검열이 삶에 대한 어떤 태도와 기준으로 남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색으로, 그러나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뚜렷함으로 살아가기를. 오늘도 내 자리에서 붓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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