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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팜비치 Mar 24. 2019

책 <행복의 기원>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다

’행복'에도 기원이 있다고? 책 제목이 흥미로웠다. 실체조차 알기 쉽지않은데 기원과 역사가 있단 말인가.

왜 사니? 하고 물으면 흔히들 "글쎄, 행복하려고?"라고 답하곤 한다. 하나의 세뇌처럼 우리는 "삶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행복이 종착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록적 접근에 반대한다. 너무 오랫동안 행복이 '생각'이라고 판단하고 철학의 영역에서 다뤄왔지만, 이는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란거다.
인간의 많은 선택은 생각(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행되며, 의식은 매우 한정된 일에서만 선별적으로 활용된다. 행복은 생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주장이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따르면 "삶이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다. 즉,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사는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란 뜻이다.
뇌는 인간을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며, 때문에 이에 근접할때 행복(쾌감)이라는 센서가 울리는 것이다. 행복 또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느낀다는 것.
 
대체로 행복(쾌감)이라는 센서는 언제 울리나?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람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집단을 꾸리고 ,'사회성'을 통해 가장 큰 고통과 쾌락을 느끼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진화해왔다. '사회적 식욕'이 셋팅되어있다는 것.
생존하기 위해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회성을 통해 쾌/불쾌를 느끼게 만들었다. 외로움, 배신감, 이별이 아픈 것은 생존에 불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차에 치이나 이별하나 뇌에서 작동하는 부분도 비슷하다. 타이레놀 먹으면 나아진단다.)
 
그러나 우리는 곧잘 행복을 물질적인 것(돈)을 통한 강력한 것(강도)으로 상상하곤 한다. 왜냐햐면
1) 'NOT불행'과 '행복'을 잘 구별하지 못하지 못하기 때문.
: 돈이 없으면 불행하지만, 특정 수준 이상으로는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불행과 행복은 찬물과 뜨거운물 두개의 수도꼭지처럼 별개의 현상이다.
돈(물질)은 사소한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큰 자극을 맛보고 나면 둔해진다. (2만원벌다가 1만원 벌면 별로 안기쁘다.)
2) 변화가 생기는 '순간'과 변화 이후의 경험을 잘 구별하지 못하며, 변화 이후 굉장히 빨리 적응함.
: 대학에 합격하는 기쁨과, 대학생이 된 뒤의 일상 경험은 별개다. 성공하면 행복해지리라 생각하지만 실상 행복엔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becoming 순간의 쾌/불쾌에 우리는 금방 적응한다. 때문에 상상하는 것만큼 불행해지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의 떨림과 환희는 곧 초기화되며, 우리는 계속해서 초기화되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 쳇바퀴를 도는 것이다.
- > 때문에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여야한다.
 
그렇다면 행복의 쳇바퀴는 누구에게 유리한가
1) "외향성"의 유전 DNA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
: 외향성이 높을수록 자극을 추구하고, 자기확신이 높고, 보상과 즐거움을 늘리는데 초점을 둔다.
외향적이건 내향적이건 행복이라는 산을 오르고 싶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이 어색함과 불편함이라는 짐을 지고 있다면 외향적인 사람의 가방은 가볍다.
2) 심리적 자유감을 가지고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항상 타인을 신경쓰느라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는다. 만남들이 나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지 않고 예민해진다.
행복(쾌락)이라는 사적인 '경험'이 남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왜곡된다. 행복에도 '정답'이 있다는 획일적 사고를 하게 되고, 정답을 맞췄다는 구체적(객관적) 증거를 찾는다. 그래서 물질에 집착하게한다.
생존만이 목표라면 돈만 있어도 살수있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아직 "사람"이라는 스위치에 행복이 켜지게 되어있다.
타인의 의견이 인생의 유일한 나침반이 되면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되며, 내 행복스위치(쾌락)를 울리는 것보다 남들의 평가를 우선하게 된다.
(나의 행복을 위한 결혼에, "예쁘게 살겠습니다~"라는 인사는 주객전도가 아닌지?)

책의 결론은 우리는 보다 나의 '쾌락'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목적없는" 자유로운 사회적 교류 속에서, 강도보다 빈도에 집중하면서.
 
진화생물학을 좋아하진 않는다. 진화론적/기계적 관점으로 현대문명 속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허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화생물학적으로 흑인이 동얀인보다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고 한들 그것이 현대문명 속 존재하는 여러 사회 단면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거나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또 '경험'의 대상으로 인간을 파악하기엔, 인간은 '그대로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로는 좀 복잡한 것 같다.
"인간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가진, 언제나 결핍된 존재다. 인간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늘 갈망한다. ", 샤르트르
생존을 위해 행복을 느끼게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것까지는 뭐 오케이. 소프트웨어 (철학)에 대한 과대평가도 뭐 인정.
하지만 하드웨어만으로 결론짓긴 어려운 것 같다. 결국은 뻔하지만 하드웨어(진화생물학) + 소프트웨어 (철학) 둘다 봐야 그나마 복잡한 인간사와 행복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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