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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폴리 Oct 24. 2020

디지털 노마드의 디지털 정착 (1)

어떻게 브런치까지 왔는가

(프렌들리한경고: 이건 일반적인 의미의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내가 지금 풀려는 나의 디지털 노마드 썰(+각종 삼천포)은 그간 내가 디지털 거처를 옮겨다닌 이야기다. 중2병이 도질 13세쯤부터 나는 줄곧 디지털 공간에 글을 써왔는데, 계속해서 플랫폼을 유목민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이사 갈 때마다 짐을 폭파시키거나 남겨두고 잊어버리다 보니, 남은 게 별로 없다. 온라인으로 남기면 웹사이트가 날아가고, 오프라인에 저장해두면 컴퓨터나 외장하드가 고장 나고. 덕분에 틴에이져 시절에 쓴 오글거리는 글들(심지어 야한 BL소설도 있었다)을 찾을 수 없게 된 건 정말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조기치매 으른이가 된 지금,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을 해서, 글을 쭈욱 남기고 싶어졌다. 막 오금이 저릴 만큼 익사이팅한 일 없이 매일매일이 비슷한 으른이 되면 이런 건지, 기억들이 황당할 만큼 뭉텅뭉텅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년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저번 주 금요일에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10살을 기준으로 쓸데없는 기억을 지우고 뇌세포가 죽어나가기 시작한다는데, 나는 그렇게 된 지 20여 년이 지난 것이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기억력에 대한 진짜 신기한 경험은 9살 겨울방학이었다. (잠깐 삼천포.) 긴긴 겨울방학 동안 숙제였던 일기를 단 한 장도 안 쓰고 신나게 놀다가 개학 전날이 닥쳐왔다. 집에는 연말연시라 친척들이 와글와글 와있어서 들뜬 분위기 었는데, 사촌오빠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불가능한 숙제를 해야 되는 가혹한 현실에 방구석에서 절망하고 있었던 나를 숙모가 구원해줬다.


"어제는 뭐 했는지 기억나잖아? 일단 어제 있었던 일을 써봐."


어제 뭘 했는지는 당연히 기억났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의 일들을 싹 다 기억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제의 일기가 써졌다.


"자 그럼 어제로 돌아가서, 어제의 어제를 기억해봐."


그것 또한 또렷하게 기억이 나서 술술 쓸 수 있었다. 그렇게 마치 최면요법에 빠진 것처럼, 나는 기나긴 겨울방학을 하루하루 되짚어나가서 전부다 기억해내고 모조리 일기를 쓸 수 있었다!!! 지금 내 머리와 비교해보면 정말 초능력이었다. 진짜로 인간은 10살까지는 뇌세포가 무한 증식한다는 걸 나 스스로 경험한 것이다. 그 후로 내 뇌는 용량이 모자라서 쓸데없다고 분리된 정보는 가차 없이 지워버리는 엄격한 서버 관리자가 되었다. 회사에서 지난 시즌에 사용한 알파카 얀 이름 따위를 기억하기 위해서 소중한 어릴 적 기억을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더 잊어먹기 전에 한 곳에서 꾸준하게 쭈욱 글을 쓰고 싶다. 여전히 뭘 먹었는지 같은 건 기억 못 하겠지만, 써놓은 글을 나중에 읽어보면 그때 일상생활이 어땠는지 기억을 세트로 불러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디지털 정착을 할 곳이 브런치가 되면 좋겠다. 아직 작가 신청을 하지도 않은 상태라 알 수 없지만, 글을 책으로 묶기도 편하고 모던하고 정갈한 에디터 디자인도 맘에 들어서 정식 입주하게 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정식 입주했다! 이예이!) 사실 시끄러운 인터넷 세상 속의 고요한 사찰temple이라고 불리는 위키피디아만큼 여기는 광고 한 개 붙어있지 않고 조용하고 청정해서 뭔가 괜찮은 곳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위키피디아는 가끔 '돈이 없어서 유지하는 게 힘들어요, 저희가 광고를 붙이지 않게 도와주세요!' 하면서 기부창이 뜨고 난 선뜻 $5 정도를 기부한다. 그래서 이곳 브런치를 운영하는 직원들은 무슨 수입으로 먹고 사는지, 이러다가 어느 날 싸이월드처럼 사라지는 건 아닌지 해서 찾아보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 하얀 창 뒤에는 최근 코스피 시가총액 10위를 찍은 '카카오'가 있었다.


홈페이지

    내 디지털 유목생활의 시초는 개인 홈페이지였다. 정말 라떼의 고릿적 이야기인데, 아 그렇다고 해서 영화 <접속>에서 나오는 천리안/나우누리 세대는 아니다. 그때 나는 아마 한국의 국..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내가 온라인 생활을 시작한 건 캐나다로 건너온 후, 윈도우XP 시절이었다. 한국의 친구들과 연락을 계속하고 싶기도 하고, 오덕질을 하기도 위해서 자연스럽게 내 온라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 개인이 자신만의 특별한 웹 공간을 보유하려면, 일일이 도메인을 사고 서버 용량을 사서, 나모 웹 에디터나 메모장으로 html 코드를 찍고 포토샵으로 버튼이나 이미지를 만들어서 FTP라는 프로그램으로 계정에 파일들을 올려서 사이트를 만들던... 지금 생각해보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제로보드>라는 게시판 시스템이 있었는데 직접 스킨을 만들거나 공유된 스킨을 다운로드해서, 일기장, 게시판, 방명록, 갤러리 등등으로 홈페이지를 구성했다. (우왓, 지금 보니 그 옛날 제로보드로 만든 사이트들이 건재한다!!) 코딩을 배운 것도 아니고 주먹구구식으로 나만의 제로보드 스킨을 만드느라 하루 종일 컴퓨터를 붙잡고 앉아있었다. 승숙(엄마)의 묘사에 의하면 나는 그 시절 눈알이 빠지도록 CRT 모니터에 달라붙어있다가 기를 다 쏟고 찍 뻗어서 잠이 들곤 했단다. 그러고 보니 싸이버 공간에서조차 나는 내 맘에 들게 꾸며놔야 직성이 풀렸었다.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게 그쯤이었다. 시력을 배리고 오롯이 내가 꾸민 싸이버 공간을 얻었다.


싸이월드

    그러다가....... 미국에서는 마이스페이스가 등장하고 한국에서는 추억의 싸이월드가 등장했다. 전 국민이 싸이월드에 가입하고 도토리로 미니홈피를 꾸미고 훗날 이불 킥이 될 공개 일기들을 남겼고 나도 가입했지만, 친구들의 미니홈피에 놀러 가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나는 개인 홈페이지에 글 쓰는 것을 계속 유지했다. 싸이월드는 미니홈피라는 이름에 걸맞게 프레임 사이즈가 쪼코맣게 정해져 있고 그걸 바꿀 수도 없는게 갑갑했다. 스킨을 직접 만들지도 못했고 팔고 있는 것 중엔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그때쯤 순전히 디자인적인 이유로 윈도우즈PC에서 애플Mac으로 갈아탔는데, 사파리에서 싸이월드의 버튼들을 하나도 클릭할수 없는 걸 보고 충격을 먹었다. 당시에 한국에서 애플이란 아이리버처럼 아이팟iPod이라는 MP3플레이어를 만드는 회사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맥을 쓰지 않으니 (맥이라는 컴퓨터가 있는지도 모르니), 당연히 사파리에서 제대로 싸이월드가 구동되는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이글루스, 미시, 구글 블로거

    내 개인 홈페이지가 사라진건 일본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서버와 도메인을 유지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때쯤 '이글루스'라는 블로그 사이트가 흥해서 그리로 옮겨갔다. 그때도 꽤 미니멀하게 하얀 디자인이었던 것 같다. (우왓, 지금 찾아보니 이글루스가 아직도 있다! 진작에 어딘가에 합병돼서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내 로그인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일본의 학교 동창들과 연결되어 있기 위해 미시인가 뭔가 일본의 싸이월드? 같은 사이트에 일본어로 근황글을 쓰다가, 미국으로 갈 때쯤부터 구글 블로거에서 무려 3개 국어 블로그를 운영하려고 무모한 시도를 했다가 금방 접었다. 같은 내용을 연이어 3번이나 쓰는 건 상상보다 훨씬 지겨운 일이었다.


(이제부터 잠시 삼천포로 빠집니다.)


무료 유학원(?) 블로그를 차리게 된 비하인드

    그쯤에 인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근래에 겪었던 코로나 백수 시절 보다도 훨씬 더 힘든 시기가 닥쳤다. 대학원에 불합격한 것. 일본에서 패션 디자인과 3년짜리 전문사 학위를 따고, 승숙의 조언, '말은 제주도로, 디자이너는 뉴욕으로 보내라'대로 뉴욕의 파슨스 패션디자인과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사실 패션디자인으로 무슨 석사까지 하냐 하겠지만, 일본에서 취직할 생각도 없었다. 일본은 나 같은 막 나가는 사람이 살기에 너무나 갑갑하고 답답한 나라다. 파슨스의 교수님과 포트폴리오 인터뷰를 하고 캠퍼스 사전답사, 투어까지 순조롭게 흘러가고 훈훈하게 마지막 미팅까지 다 마쳐서 합격인 줄 알고 두근두근 뉴욕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불합격이라는 만우절 거짓말 같은 통지서를 받았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 대학원을 가려면 4년제 학부를 졸업해야 하는데, 일본의 3년제 졸업은 자격미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맨 처음에 서류전형에서 떨어트릴 것을,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했길래 교수들 다 만나고 하하호호하고 한참 뒤에 떨어트리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전시 같은걸 통하지 않고 내가 혼자 원서를 넣었기 때문에 뭔가 놓친 게 없나 싶어서, 심지어 뉴욕까지 비행기 타고 직접 교내 입학상담을 하러 갔단 말이다. 내가 뭔가 빠트린 게 없는지 알려달라고 했더니, 상담원이 내 앞에서 자기 컴퓨터에 파슨스 웹사이트를 띄워서 모니터를 내쪽으로 돌렸다.


"사이트에 다 나왔고요, 이대로 하면 돼요."

"야이 색히야, 학교 웹사이트는 그냥 우리 집에서도 볼 수 있거든? 내가 이거 보려고 굳이 여기까지 왔겠냐??"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얼이 빠져서 그놈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 그놈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파슨스 사이트에는 '미국이 인정하는 4년제 졸업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쓰여있지도 않았다. 포트폴리오는 몇 장이고 외국인이라면 토플 점수가 몇 점이어야 하고, 이런 건 자세히 나와있지만 그것만은 쓰여있지 않았다. 그냥 미국인들의 상식이었던 것이다. 나처럼 해외(일본/캐나다)에서 혼자 준비해서 신청하는 애는 사이트에 안 쓰여있으면 내가 뭘 모르는지 알 길이 없었다. MFA: 마스터 오브 파인아트, BFA: 베첼러 오브 파인아트, 이런 교육업계(?) 용어도 원서 준비하면서 난생처음 보았다.


    불합격 통지서를 받은 후 전화해서 폭풍 따져본 결과, 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피땀 눈물로 졸업한 일본의 3년제 졸업장은 심지어 미국에서는 온전히 3년으로 봐주지 않고, 미국에서 교양과목을 2년 치나 수료해야 미국의 4년제로 인정받아 대학원에 갈 수 있단다. 2년짜리 패션디자인 대학원에 가려고 무슨 팔자에도 없는 교양학과를 2년이나 하라고!? 그게 무슨 심한욕심한욕심한욕까먹는 소리야? 애시당초 교양학과 가면 뭘 배우는데!??


"아니, 교양과목liberal arts이 정확히 뭔데요?"

"음, 유노you know...? 어학, 문학, 역사, 철학... 그런 거요."


    '푸흡' 하는 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얼핏 들은 것 같았다. 마치 그런 것도 모르냐? 는 식으로. 알고 보니 미국은 대학에서 '교양'을 엄청 중요시하는 나라였다. (그런 놈들이 대통령은 그런 사람을 뽑냐? 아, 대학 진학률 낮지...) 그렇게 파슨스 대학원에 넣을 예정이었던 빠듯한 자금을, '미술작품 보는 방법'이니 '베스트셀러 읽기'니 '여러 도시의 역사'같은 혼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수업을 듣는데 부어 넣고, 한국어 일본어 시험을 봐서 언어 학점 치트키를 써서 2년 치 학점을 1년 만에 해치우고 파슨스 대학원에 갔다.


네이버 블로그

    휴지조각처럼 느껴지게 된 일본 최고 90년 전통 문화복장학원 졸업장과, 내 등골을 빨아먹은 미국 교육기관들의 자본주의와 관료주의를 향한 억울함이 융합해서 핵폭발을 했다. 나는 스트레스를 글로 푸는 사람이어서 네이버 블로그에 이 상황에 대해 와르르르 글을 썼더니, 패션디자인 유학을 생각하는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나에게 상담 댓글, 상담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답변을 해주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고, 똑같은 비슷한 질문이 계속 오길래, 그냥 '모두들 다 보세요' 하고 신상을 필터 처리한 답변들을 블로그에 공개해놨더니 글이 불어나고 검색 노출도가 올라가서 더욱더 질문이 많이 왔다. 거의 돈 받고 컨설팅해주는 유학원을 차려야 할 정도였다. 이미 글에 다 올라와있는데 제대로 안 읽고 질문을 하는 애기들도 많아서, 요즘 아이들이 난독증이 심하구나 (이게 다 서마터폰 중독 때문이다!) 했다. 띄어쓰기를 하나도 안 하고 쪽지를 보내는 애기들도 있었고. 이제 막 유치원을 졸업한 딸을 훗날에 파슨스 보내고 싶어서 지금부터 돈 모으느라 희생할 거라는 젊은 부모도 있었고, 뉴욕에서 실제로 만나서 상담을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무료 유학상담(봉사) 블로그에서 슬슬 손을 떼게 된 이유는 취직하고 몇 년 지나서부터다. 그렇게 고생해서 유학하고 졸업하는데 잘 풀려야 회사원이라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었다. 엔딩을 뻔히 아는데 더 이상 의욕적으로 유학을 도와주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이버 블로그 플랫폼 자체가 점점 지저분해졌다. 블로그를 팔라는 쪽지와 이메일이 계속 오고, 무슨 광고 팝업이 뜨고, 전체적으로 상업적으로 변했다. 돈 받고 온갖 물건들과 맛집들의 후기를 쓰는 사람들, 솔깃한 제목으로 낚시를 한 다음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내용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제일 황당한 건 네이버 자체다. 한국 내 검색엔진 1위라는데, 내용 결과물에서 가장 먼저 위에 보이는 건 신빙성 있는 공식 웹사이트보다 블로그에 누군가가 쓴 개인적인 글이다. 분명히 블로그를 통한 광고수익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좋은 내용을 쓰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지만, 결론적으로 사이트 디자인과 인터페이스가 10년 전 조잡함 그대로여서, 거기에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분량조절 실패로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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