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죄인을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다
코로나 실업자 파도와 더불어서 이 세상에 불어닥친 파도가 있는데, 바로 ‘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놀러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처박혀있다 보니, 자기들이 24시간 뭉개고 있는 집들이 맘에 안 들기 시작했다. 쪼그만 방 사이즈도, 부엌의 냉장고와 싱크대의 불편한 배치도, 창문 밖 풍경(옆집 담벼락 or 도로)도, 죄다 눈에 거슬리게 된 것이다. 특히 지금 내가 있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는 집은 걍 씻고 자는 데고, 바깥의 화려한 도시 라이프를 즐기며 보상받는 식으로 다들 살아왔는데, 도시 라이프가 말 그대로 셧다운 되면서 사람들은 좁고 비싼 닭장에 갇혔다. 내 돈 내고 내가 갇힌 감옥이라니. 그래서 지금 2020년 가을의 맨하탄은 14년 만에 최고의 공실률이란다. 뉴요커들이 닭장을 탈출해 근교의 집다운 집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미 부자들은 맨하탄의 고급 콘도를 비워두고, 업스테이트 뉴욕(캐나다와 가까운 북쪽 동네)이나 햄튼(바닷가와 가까운 동쪽 동네)의 자기들 별장으로 들어가 버린 지 오래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뉴저지의 1 밀리언 달러(대충 10억 원) 내외의 자그마한 마당 있는 집들이 나오면 오프닝 하우스를 참관하려고 이 시국에 바글바글 줄 지어 서서 기다리고, 집을 팔 생각이 없는 사람들한테도 집 파실 생각 없냐는 전화가 온다고 한다. 괜히 죄를 지으면 사람을 감옥에 넣는 게 아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밖을 돌아다닐 자유가 있어야 행복한가 보다. 여기 사람들이 괜히 여름만 되면 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도 안 깔고 벌러덩 벌러덩 누워있는 게 아니다. 뉴욕에는 무늬만 창문이고 햇빛이 전혀 안 비치는 반인륜적인 공간에 거주하는 것이 흔하다. 코로나 때문에 공공장소들을 피해야 하는 지금, 그런 공간들은 집이 아니라 감옥이 되었고, 점점 더 맘대로 눈치 안보고 여유를 느낄수 있는 바깥 공간에 대한 고달픔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내 안에서는 심하게 치솟고 있다.
이 증상은 최근 캐나다의 본가에 다녀오면서 심각해졌다. 승숙(엄마)의 캐나다 집은 북미의 평범한 2층 집이다. 20년 전, 하늘을 가릴 정도로 키 크고 무성한 나무들 속에 같은 초록빛 지붕에 하얀 벽을 두르고 들어앉아있는 2층 집을 보고, 이제 막 이민 온 승숙은 ‘어머나, <빨간 머리 앤>의 오두막이야!’하면서 뿅 가서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웅규(아빠)는 한국에서 일하느라 그 집에서 거의 살지 못했고, 나는 반항적인 틴에이저 시절을 보내다가 패션 디자인을 한다고 도쿄로 뛰쳐나갔고, 승숙과 헤럴드(동생)만 그 집에 남았다. 그리고 헤럴드가 성인이 되자 승숙은 이제 웅규를 더 보살펴야겠다며 한국으로 주둔지를 바꿔서, 그 큰 집에 주로 사는 생명체는 헤럴드(은둔자) 혼자가 되었다. 그 초록지붕 집은 승숙과 웅규의 노후에 살 곳 혹은 자금이라는 명분으로 유지되고 있다. 지하실의 방 2개까지 합하면 방이 5개인 집이다. 정확히 재보지는 못했는데 지하, 1층, 2층을 다 합하면 대충 100평 정도 될 것 같다. 앞 뒤 마당도 크다. 헤럴드 혼자서 그 공간을 다 놀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뉴욕의 이 조그만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들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공손한 주머니쥐처럼 자그맣게 몸을 말고 살고 있다. 캐나다의 그 큰 집에 남아도는 공간이 아까워서 눈알이 시릴 정도다. 그 집에 살면서 뉴욕의 직장으로 출퇴근을 하면 딱 좋을 것 같다. 아니 왜 2020년인데 아무도 공간을 워프 하는 문짝을 발명해내지 못한 거지? 과학자들은 뭐 하고 있었단 말인가!! (과학자들은 조만간 지구에 슈퍼바이러스가 나타나서 판데믹이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애당초 ‘캐나다 재미없어 싫어!’ 하면서 스무 살에 그 집을 뛰쳐나간 건 본인이다. 그 당시 나는 경제관념도 없고 열정만 가득한 가장 위험한 유형의 오덕이었는데, 하필 좋아하는 것들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다 있었다. 만화책. 애니. 비주얼롹밴드. 구체관절인형. 펑크 브랜드들. 캐나다에서 이것들이 만들어져 나왔으면 난 캐나다를 안 떠났을 것이다. 캐나다는 어린이와 노인에게는 천국이라지만 해외 문물에 취향을 둔 틴에이저들에게는 척박한 사막이다. 인터넷도 느리고 배송도 느리고 비싸다.
그러다가 승숙이 '생명과학과로 진학하면 네가 좋아하는 콘서트를 보도록 일본으로 졸업여행을 보내주겠다'는 낚시에 낚여서 들어간 대학교의 학업이 잘 될 리 없었다. 생물진화론 시간에 진화과정 차트의 화살표를 곡선으로 동글동글하게 그렸더니 '크리에이티브하게 그리지 말라'라고 혼이 나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주변에 구구단을 14단까지 외운다는 인도 친구들은 정말 공부하는 게 신나 보이는데, 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집중력은 점점 떨어지고 우울해지자 멍청이가 되었다. 미적분 시간에 전체 성적의 30%를 결정한다는 시험지를 받았는데 종이 한 장 짜리였다. 맨 위에 문제가 한 줄만 덜렁 있고 그 밑의 망망대해 같은 공간을 채워야 했지만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도대체 미적분은 일상생활 어디에 쓸 수 있는가?) 화학은 강의 2시간 동안 하나도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내가 뭘 어떻게 모르는지도 몰라서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물리 시간이 이해가 조금 되고 재미있었지만 그 외 과목들은 거의 다 쀄일 Fail 예정이었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안 살림을 다 부셔가며 승숙과 싸웠지만 '미술 하려면 집을 나가'라는 말에 쪼그라들어서 다시 다른 학교의 똑같은 과에 들어갔는데, 이번엔 상태가 더 심각했다. 이젠 만화책 조차 읽을 수 없을 만큼 집중력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갔다. 두 번째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결국 자식이 부모를 이겼다. 2년여간 정신이 다 털렸지만 결국 진로 전쟁에서 승리해 반 미쳐있는 상태의 딸래미는 히죽거리며 이왕 이긴 것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내 남자 친구 이야기>와 <파라다이스키스>라는 만화책에 나오는 도쿄의 그 패션디자인학교에 가기로 했다. 얼어붙은 캐나다의 답답한 현실을 탈출해, 벚꽃이 휘날리는 일본 만화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이륙하던 비행기의 창문 밖 캐나다 땅덩어리를 내려다보며 뻑..를 날린 게 아니고, 손목의 철갑이 풀려서 자유의 몸이 된 지니처럼 상쾌통쾌해했다.
그리고 시간을 빨리 돌려, 디자이너가 되겠어! 하면서 독이 바짝 올라있던 어린이는, 도쿄와 뉴욕의 조그만 아파트를 전전하면서 공부하고 취직해서, 남의 돈을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월급이 통장을 훑고 지나간 은행 잔고를 엑셀 차트에 넣어보고 이렇게 모아서 언제 내 집을 사나 좌절하는 으른이가 되었다.
그동안 어디 가지 않고 캐나다의 그 집에 쭈욱 남아있던 헤럴드가 땡잡은 거다. 사실 헤럴드와 나는 서로 생일 때조차 연락을 안 할 정도로 찐 남매 관계라서 지금 뭘 생각하면서 그 큰 집에 혼자 앉아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살고 있는 누나’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만약에 지금껏 캐나다에 쭉 있었더라면 여전히 재패니즈 서브컬처 오덕질을 졸업하지 못하고 일본에 가고 싶어 하는 정신 못 차린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뭔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잃어버리고 나면 소중함을 깨닫는다. 코로나 백수가 된 2020년 여름, 한 달 동안 캐나다의 넓은 집 안과 마당을 휘젓고 다니다가, 뉴욕의 작고 귀여운 아파트로 돌아온 날 저녁, 숨이 탁 막혔다. 창문을 다 열어재끼고 모기장 너머 노을 속에 저어어어어어어 멀리 모기 바늘 만하게 보이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노려봤다. 현타가 왔다. 언제까지 여기에 살아야 하지?
나는 뉴옭씨리라이프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게 없다고 해서 심심해 죽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집순이다. 집 밖에 나가면 기가 빨린다. 꼬맹이 시절에 구체관절인형놀이나 롹 밴드들을 쫓아다닐 때는 쫓아다니느라 바쁘게 싸돌아다녔지만, 그것들을 다 졸업하고 뉴욕에서 회사를 몇 년 다니고 나자 정신연령이 급 할머니가 되었다. 방 안에는 화초가 넘쳐나서 둘 데가 모자라고, 가끔 취미로 뜨개질까지 한다. (본업이 스웨터 디자이너다.) 매트릭스 1편을 20번 넘게 보고 롹 콘서트에 가서 헤드벵잉을 하던 꼬맹이가 어느새 폭력적인 액션 영화나 끔찍한 뉴스나 역사 이야기 조차 절대 못 보는 심약한 가슴이 되었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뉴욕이라는 더러운 콘크리트 정글이, 사회생활이라는 기 빨아먹는 괴물이, 나를 시골 숲 속의 오두막에서 난롯불을 떼며 흔들의자에 앉아있어야 하는 영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오두막은 예쁘고 모던한 디자인 이어야 한다. 그동안 디자인업을 하며 괜히 취향만 겁나 까다로워진 것 같다.)
순전히 이노무 비싼 도시에 살고 있는 건 여기가 내 레디투웨어* 니트 디자이너라는 마이너한 직업을 구하기 제일 쉬워서다. 아무도 내가 패션 디자이너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너 그거 하면 대도시에서 비싼 월세 내면서 발발거리며 살아야 한다!라고 경고해주지 않았다. 그저 '말은 제주도로, 빠쑝 듸자이너는 뉴욝으로 보내야지!' 하는 승숙의 어드바이스가 있었을 뿐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말 그대로 '뉴욕에 사는 패션 디자이너-손가락이 너무 오그라들어서 타이핑을 못 할 뻔했다. #현실은회사원-'가 되긴 되었다. 하지만 천리안을 갖고 있는 승숙도 2020년에 범세계적 전염병이 창궐해서 내가 회사에서 짤리고 쪼그만 아파트에 갇힐 줄은 몰랐다. 그리고 더 억울한 건, 기적적으로 3개월 만에 새 직장을 구하긴 했지만, 코로나가 끝나기는커녕 세컨드, 써드 웨이브가 계속 오고 있어서 재택근무를 하며 여전히 쪼끄만 아파트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재택근무가 너무 좋았다. 뉴욕에서 전철로 출퇴근한다는 것은, 이 코로나 감염자 세계 최강국의 미국 내 인구밀도 최고도시에서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는 단점도 있지만, 원래부터 뉴욕 전철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더럽고 미친 인간들도 많아서 싫었다. 싫은데 위험해지기까지 하다니 최악이다. 집순이라서 당연히 재택근무가 더 좋다. 다만 이 집이 재택근무에 적합한 집이 아니었다는 반전. 이 집은 자그마한 아파트다. 그리고 난 사랑하는 남푠과 고양이와 월세 부담을 나눠주셔서 무한히 감사한 룸메이트 두 명과 옹기종기 살고 있다.
(*레디투웨어는 쉽게 말해 하얀 티셔츠 한 장에 10만 원 이상 비싸게 이름값을 매기는 컬렉션 브랜드다. 빠히 뉴욝 밀란 쎄울 등등 대도시에 본거지가 있고 그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위크에서 돈을 런웨이 쇼를 한다. 원래는 옛날 고릿적에 샤넬이나 디올이 처음 생기고 손님 하나하나 맞춤 드레스나 고급 양복-오뜨꾸뛰르-을 만들던 시절, 적당한 사이즈로 미리 만들어놓고 '바로 입을 수 있게 준비'되서 조금 더 저렴한 옷이 'Ready to wear' 였는데, 모든 게 대량 생산되는 지금은 모든 옷이 바로 입을 수 있는 거라 사전적 의미가 무색해졌다. '레디투웨어=걍 비싼 옷'이라고 보면 된다. 얼마나 비싸냐면 내가 회사에서 디자인한 옷이 출시되면 내 월급으로는 정가에도 세일가에도 못 산다. 나는 회사가 준 쿠폰으로 산 옷이나, 캔슬되거나 디벨롭 과정에서 만들어진 샘플을 주워 입고 살고 있다.)
내가 한동안 숨겨놓은 꿀단지를 몰래 열어보듯이 매일 밤 들어간 웹사이트 이름이다. 이게 포르투갈어 인지 스페인어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구글 번역을 돌리면 왔다 갔다 한다. 두 언어가 비슷한가 보다. ‘까사 casa’가 스페인어로 ‘집’이라는 건 안다. 건축 사이트를 구경하다 보면 집 이름이 '까사'로 시작하는 집이 많이 나온다. (ie. 최근에 가온건축에서 지은 제주도의 집도 이름이 '까사가이아'다) 스페인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내가 저 사이트를 찾게 된 루트는 이랬다. 패션 디자이너라면 지겹도록 핀터레스트에 들어가서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러고 있던 어느 날, 인테리어 디자인 쪽으로 삼천포에 빠졌다가 눈에 띈 도면이 있다. 야자수가 무성한 걸로 보아 분명 따뜻한 지방의 집 도면이었다. 프라이빗한 야외 공간. 나 혼자 햇빛을 받으며 빨게 벗고 돌아다닐 수 있는 개인적인 바깥 공간이 골고루 있는 트로피컬 대궐 같은 그 집 도면을 난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가 내 비밀 욕망 보드에 핀 해놓았다.
요즘 집에 대한 집착이 커지고, 아무도 안 시킨 나 혼자 만의 연구가 깊어지면서, 그 도면을 어느 건축회사에서 그린 건지 본격적으로 궁금했다. 레퍼런스 이미지가 어느 브랜드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기능인 구글의 이미지 리버스 검색을 돌렸더니, 맨 처음에 나온 웹사이트가 바로 위에 말한 까사쓰빠라어쩌고다. 포르투갈의 건축회사 사이트였다. https://casasparaconstruir.com/ 정확히 그 도면이 올라와있진 않았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그리고 굉장히 작은 사이즈의 집부터 골고루 여러 가지 집의 도면과 3D 영상을 올려놓고 건축에 필요한 도면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내가 가장 맘을 빼앗긴 요소는, 거의 모든 집에 야외 키친과 수영장이 있었다.
그냥 데크에 바비큐 기계 하나 덜렁 놓은 게 아니고, 집안의 키친과 똑같이 본격적으로 바깥에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휴양지의 호텔 비치에 가면 있는 야외 칵테일바가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따뜻한 지방에 사니까 이렇게 자주 바깥에서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는가 보다. 부러웠다!!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해서, 이렇게 야외 키친을 만들어놓는게 그 동네의 국룰인가 궁금해서 조금 찾아보았지만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방송 <구해줘 홈즈>의 스페인편에서 나온 집들은 대부분 아파트여서 해당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까사쓰빠라 건축 사이트에 올라온 도면 중에서 8미터 곱하기 20미터 (48평) 짜리의 작은 대지에 꼭 들어맞게 앉아있는 이 도면과 나는 사랑에 빠졌다. 작은 야외 키친에 미니미니 한 1.8*3미터의 수영장이 있는 2층 집이었다. 이 정도의 현실적인 크기라면 뜬구름 잡는게 아니고 뭔가 언젠가 실현이 될 것 같았다. 작은 대지에 꽉 맞춰서 올린 모양이, 도시의 작은 면적의 땅에도 적용할수 있을것 같았다. 뉴욕은 좁아터져서 주택가에도 집과 집 사이 공간이 없고, 아파트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양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에 그런 좁은 집터가 생긴다면 이런 집을 지을수 있을 것 같았다. 수년간 뉴욕 부동산에 올라온 집들 사진을 보고 실망에 실망 퍼레이드를 이어오던 나는, 오래된 버릇 같은 생각이 발동한 것이다.
없으면 만든다! 이런 느낌으로, 짓는 거야! 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