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하기에
유럽의 삼월은 생각보다 추웠다. 한국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팔천오백여 킬로미터. 이만리(里)만큼의 변화에 몸도 맥을 추지 못했던 걸까.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추위 알러지를 앓게 되었다. 까막눈이었던 탓에 한참을 매대 앞에 서서 번역기 자판을 토독인 끝에 필요한 영양제를 살 수 있었고, 두툼한 외투도 매장을 서너 군데는 뒤적인 후에야 주머니 사정에 맞는 것으로 건질 수 있었다. 타지 생활에 적응해야 할,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구매한 첫 선물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굳게 믿었기에 이방인으로서 초반의 고충은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봄을 지나 여름을 맞았다.
숱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의 첫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즈음에는 장을 보는 시간 대부분에 번역기를 뗄 수 있었고, 동네의 지리가 제법 익은 덕에 지도 없이도 이리저리로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얕게나마 가능해졌고, 이곳의 관습을 서투르게나마 체화할 수 있었다. 칠월 너머 구월을 훌쩍 넘길 동안 친구들과 보낸 시간은 작열하는 여름의 햇빛을 닮아 생광하기 그지없었다.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했더라도, 더 이상 얼타지도 않는 모습에 만족했다. 따스하게 빛났던 유럽에서의 나날이었다.
어느덧 시월. 선선한 바람과 함께 새 학기도 찾아들었다. 내년을 위해 실습 자리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여름 동안 공들였던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회사에 선보이기 바빠졌다. 물론 거절을 받아들일 각오도 되어 있었다. 가을 끝자락에 다다라 무서운 속도로 궂어지는 날씨만큼, 받은 메일함도 거절 의사로 빼곡히 채워졌다. 바람이 새어 나가는 풍선처럼 알게 모르게 서서히 위축되고 있었다.
그간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던 인종차별은 쪼그라진 나를 집어삼켰다. 길거리에서 듣는 불특정 다수의 “칭챙총”도, 늦은 밤 역전에서의 캣콜링도, 식당에서의 도촬도, 노골적인 음담패설도 감수할 수 있었다. 저들은 단지 소수일 뿐이니까. 감수해야만 했다. 나는 메이저에 속하지 않은 마이너, 즉 외국인이었으니까. 견딜 수 없었던 건 미묘함으로부터의 불쾌감이었다. 여행 짐으로 한껏 부푼 가방을 문제 삼은 마트 직원의 검사에 응해야 했고, 맨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도 한참을 부르지 않던 직원의 태도를 그저 바빠서 그랬을 거라 짐작해야 했고, 바나나를 구경하는 나를 지켜보던 금발머리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애써 넘겨짚어야 했다. 어쩌면 나는 한순간에 집어삼켜진 것이 아니라 천천히 침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느새 누군가의 선의조차도 그 의중을 의심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느꼈다. 설상가상, 무수한 거절 메일에 이곳에서의 구직 활동은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스트레스로 인한 잦은 폭식에 몸은 퉁퉁 부어 있었을뿐더러 혼자서는 번화가를 걷는 것조차 두려웠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서. 고심 끝에 이번 학기를 마치고 타지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때 이른 한국행 비행기표는 나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마켓 거리를 수놓은 전구들은 여름만큼이나 반짝였지만, 마음만큼은 아리도록 추웠던 유럽에서의 겨울이었다.
이듬해 이월, 한국에 돌아와 학업을 중단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손 쓸 수 없이 꼬여버린 상황에 절망한 채 숨죽여 울던 날도 있었다. 실패로 얼룩진 인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오래도록 바라왔던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음에도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나였고, 여전히 좋아하는 일에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었다. 다시 여름을 지나 가을. 새로운 도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곳은 하나의 세계였다. 데미안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하듯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그 세계를 깨고 태어났음에 불과할 뿐이다.
2023년 8월 29일,
깊어가던 어느 늦여름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