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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Sep 30. 2022

뻔한 클리셰 속 생각해볼 만한 것

넷플릭스 시리즈 <우주를 누비는 쏙독새>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가 교환 학기를 마치고 떠난 뒤 공허함에 찾아본 작품이다. 친구의 추천이 있지는 않았고, 그저 검색창에 '일본'을 쳐서 나오는 작품들 중 가장 마음이 가는 포스터를 골랐던 게 감상의 시작이었다. 별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지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나에게 나름의 고민을 안겨줬고, 일본 특유의 영상미까지 더해진 덕에 제법 감상하는 맛이 있었다. 가볍게 볼 만한 일본 감성의 드라마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이 제격이지 않을까.


출처 넷플릭스



어느 날 걸려온 전화, "내 죽음을 똑똑히 봐"


예쁜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는 아유미. 그녀의 곁에는 어릴 적부터 어울렸던 소꿉친구 고시로카가가 있다. 오랫동안 좋아하던 고시로에게 고백을 받은 아유미. 두 사람의 첫 데이트 날, 아유미는 알 수 없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발신자의 정체는 아유미와 같은 반인 우미네. 잘나지 않은 외모에 우울한 성격 탓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학생이다. "나, 죽을 거야." 예상치 못한 말에 뒤를 돌아보니 옥상에 위태로이 서 있는 우미네의 형상이 보인다. 자신을 지켜보라는 말을 끝으로 투신하는 우미네. 아유미는 충격의 여파로 그만 쓰러지고 만다.


병원으로 옮겨진 아유미. 정신을 차리자마자 우미네의 상태를 묻지만 간호사의 의아한 눈빛만이 잇따를 뿐이다. 그때 간호사의 뒤로 비치는 거울.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몸이 아니다. 낯설지 않지만 자신의 것도 아닌 이 몸. 바로 우미네의 몸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는 아유미. 자신은 우미네가 아니라며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우미네의 엄마는 되려 손찌검으로 그녀를 다그친다. 아유미의 엄마조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자신과 몸이 뒤바뀌었을 우미네를 찾아간다. 시치미 끝에 자신이 우미네임을 인정하는 그녀. 각자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보자 하는 아유미에게 돌아오는 건 우미네의 냉소였다. "내가 그렇게 할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으니 고생 한번 해보라는 우미네의 대답에 아유미는 무너지고 만다.


어쩌면 평생 우미네의 몸으로 살아야 할지 모르는 아유미. 과연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을까.


출처 넷플릭스




뻔한 클리셰와 찾아보기 힘든 개연성


예로부터 학원물은 대개 시청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전개가 공통분모였다. 이 작품이라고 다를 바 있으랴. 학생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주인공과 그를 지켜주는 주변 인물들, 다소 과장된 행동들 - 이를테면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표현하는 분노라든지 - 까지 뻔하디 뻔한 클리셰는 배우들의 연기력조차 반감시켰다.


또한 몇몇 장면은 개연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례로 아유미가 자신을 비웃는 학생들에게 무작정 싫어하지 말고 자신을 잘 알아달라며 호소하는 장면은 어떤가. 배우의 연기력은 순탄했으나, 안타깝게도 대본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볼을 만져보라는 아유미의 뜬금없는 제안에 이어 아유미의 볼이 부드럽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긍정적으로 바뀌는 여론. 우미네의 몸으로도 사랑받는 아유미의 모습을 표현해야 하는 전개상의 부담과 나라 간 문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처럼 개연성 없는 장면들은 내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물음표를 띄우게 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넷플릭스


결국 1화부터 6화까지 드라마의 전개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까지도 나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드라마 <언내추럴>을 감명 깊게 본 사람으로서 모든 일본 드라마가 이처럼 진부한 전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대부분의 장면이 뻔했다.



 

성격이 외모를 앞설 수 있을까


사랑받아야 하는 건 겉인가, 속인가


이 작품, <우주를 누비는 쏙독새>의 캐치프라이즈다.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우미네의 몸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유미의 초긍정적 성격이 퍽 샘이 난다. 하지만 이내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녀의 성격은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아름다움을 마다하는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장대한 역사 속 기준은 바뀌어왔을지 몰라도 아름다움은 늘 우위를 점해왔다. 성격에 모가 나지 않은 이상 언제나 타인의 호의가 따랐을 테고, 그러한 주변의 태도는 한 사람을 행복에 잠겨 살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유미의 긍정적인 성격도 그녀의 선천적인 미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우미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복한 가정환경과 빼어나지 못한 외모는 그녀를 자꾸만 짓밟았을 것이다. 자신에게만 쌀쌀맞은 세상 속에서 우미네는 자신의 배경과 외모를 한없이 비교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분을 이기지 못해 아유미의 몸을 빼앗았을 만큼 말이다.


외모도 성격도 결국에는 대물림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으로 호의를 누린 사람들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잉태하여 축복 속에서 보살피는 반면,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냉소적인 세상에서 평생토록 그들의 결여를 탓하게 되지 않을까.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유미였지만 더 많은 공감을 자아낸 건 우미네였다.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니.


뻔한 클리셰 범벅에 단조로운 전개가 아쉬웠지만, 세상이 외모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심오한 고민을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킬링타임용으로 추천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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