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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Sep 16. 2020

누군가, 그동안 가보고 싶던 곳 있어요?라고 물어준다면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 서점에서 표지를 보고 홀린 듯 집어 든 책이다. 시칠리아는커녕 근처도 가본 적은 없으나 책 표지에 그려진 오렌지, 레몬, 바위 같은 것, 신전 같은 것, 해초인지 남부의 식물인지 알 수 없는 것, 신화 속 인물 같은 것 그리고 왼쪽 상단 귀퉁이 태양선 다발 만으로도 책에서 시칠리아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기약 없어진 먼 나라 여행이 그리워서였을까,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에너지는 혼자 덩그러니 놓아진 여행지에서 받아와서일까, 작가가 시칠리아에 가게 된 이유부터 그곳에서 겪은 소소한 일상 같은 여행 같은 일들을 묘사한 많은 문장들이 내 일인 양 마음에 왔다. 시칠리아는, "동네는 고요했고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사로웠고 공기에서는 올리브 오일에 양파를 볶는 달큼한 냄새가 풍겼다."라고 한다. 어느 여름날 프랑스 여행이 머리를 환기하며 지나간다. "하이힐을 신고 헬멧 아래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여유롭게 거리의 흐름에 맞추어 일터로 가는 여성들을 보고 있을 때 비로소 이탈리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는 글에서 베트남의 오토바이 행렬이 내뿜는 연기로 코 끝까지 퀘퀘 해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은 평온한 하루 걱정들은 종일토록 잠복해있다가 밤을 틈타 우리를 내습한다."는 문장 속에서, 지난여름 아이를 두고 홀로 미국에 가서 기껏 신나는 일과를 보내 놓고는 밤새 잠 못 들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몽골 해진다. 그렇게 내 지난 여행을 복기하는 건지 책을 옮겨 적는 건지 모르게 많은 문장을 꾹꾹 눌러 적었다. 오랜만에, 문장의 쉼표까지 읽었다.



작년 한 달 혼자 미국에 가 있었다.  한 달은 단순히 지난 10년 간의 직장생활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저 애 엄마의 1달 자유 시간 정도가 아니라, 지난 5년 간 숱하게 휘청이면서 어떻게든 해나가려고 애썼던 자신을 돋우며 시간과 상황에 질질 끌려다니던  내 자신으로 돌려놓았던 시간이었다. 삶에 쓸모없이 들러붙어 있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왔다. 하지만 미국에 다녀온 일, 정확히는 사람이 도화선이 되어 이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힘든 상황을 수개월 간 겪었다. 그래서  지난 수개월 간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그곳에 가지 말아야 했을까?" "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힘들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때마다 내 대답은 줄곧 하나였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녀와야 했어. 한 달의 시간 이후 내 일상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거나 모든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극강의 정신 상태가 되었다거나 하는 변화 없이, 그 한 달은 마치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 따위를 보다가 pause 버튼을 누른 뒤 잠시 나갔다 와서 다시 play를 누른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흘러갔지만, 오히려 힘든 일들이 아무리 닦아도 켜켜이 쌓이는 다락방 먼지처럼 그렇게 쌓여갔지만 그럼에도 다녀와야 했어.


엄마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한다. 내가 돌아왔을 때, 매우 낯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그럴 수밖에. 엄마는 무엇이 그토록 좋았느냐고 물었다. 혼자 기차를 탔어, 거리를 걸었어, 서점에 갔어, 자전거를 탔어, 카약을 탔어, 커다란 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어. 이런 일들을 시답지 않게 나열하다가, 그래, 마지막 날 저 건너편 섬을 바라보며  섬에 가는 페리를 탈까 말까 하고 선착장에 앉아 한참 고민하는데 말이야, 태양이 작살처럼 내게 내리꽂였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페리를 타지 않아도 되겠다고, 그리고 이 번 한 달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결정적인 순간마다 꺼내 보리라는 걸 알았어.  

아마 작가에게도 시칠리아에서 보낸 두 달이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책에서 말한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라고. 같은 호흡으로 문장들을 읽었다.   익숙한 감성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은 매우 즉흥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EBS 여행 프로그램 프로듀서가 어디로 여행하고 싶으냐고 물었는데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그곳을 말이다. 그 여행은 마치 예정된 운명의 실현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우리들은 이제 코로나 이전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무심하게 느껴지는 한 문장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하지만, 이 시간을 조심히 지내다 보면 우리에게도 다시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그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은 바다 하나 건너가는 것도 영원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앞다투어 쏟아지는 동남아 어딘가의 태양 빛에 노곤히 지금의 시간들을 녹아내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들과 "아 우리 진짜 별 일을 다 겪었다. 그지?"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면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날이 오면, 누군가 "그럼 혹시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 없었어요?"라고 묻는다면,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지금 우리 마음을 뭉근하게 만드는 어딘가를 툭 이야기하게 되겠지. 그리고 운명처럼 그곳에 가게 되겠지. 낯선 풍경 속 생경한 공기에 취하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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