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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Nov 23. 2020

밤 중에 제일은 가을밤

 

유난히 달이 예뻐서 한참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날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대체로 가을에 많았는데 사람 마음 다 같은지 시에서도 소설에서도 그렇게 가을 달을 노래하는 일이 많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이효석이 그렸던 흐붓한 달빛은 막 피어난 메밀꽃을 빛나게 만들어 숨까지 막힐 정도였으니 보름달쯤이겠고, 도연명이 사시, “가을밤 달빛은 휘영청 밝기만 하다 (秋月揚名揮) ” 의 달 또한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가을 달 하면 초승달이 떠오른다. 초승달이라고 해도 봄 여름 겨울 초승달이 아닌 가을의 초승달이 떠오른다. 가장 밝다는 춘분의 초승달을 넋 놓고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가을의 초승달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날이 많았다. 달은 태앙이 지나가는 길, 그러니까 황도와 거의 같은 길을 지나는데 황도의 기울기가 계절에 따라 변하다 보니 봄에는 초승달의 거의 지평선과 수평인, 누워있는 상태로 지는 반면 가을에는 수직으로 마치 서 있는 상태로 진다고 한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그림으로 그리는 초승달은 대부분 가을 달인 것이다. 초승달은 원래 해가 지고 1~2시간 동안만 볼 수 있으니 붉은빛을 막 벗겨낸 하늘이 아직 새까만 어둠을 칠하기 전 옅은 남색 정도가 되어있을 때, 내가 고개를 살짝만 들어도 볼 수 있는 높이에 노랗게 수직으로 떠 있으니 예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천상 공대생 남편은 나의 가을 초승달 예찬을 듣자 가을 초승달에 토끼가 떨어지면 어쩌냐고 했다. 토끼가 저기서 떡방아를 찧고 있을 텐데 저렇게 달이 서 있으면 미끄러져 내려갈 수도 있단다. 0과 1의 세계에 사는 사람까지 흐붓하게 만드는 가을달이다.
 
며칠 전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봄여름에 몇몇 분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았다. 아참 그랬었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러운 기분이 물 밀 듯 밀려와 뚝뚝 떨어졌다. 사실 나는 그즈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전 날 밤의 지독한 꿈 이기를 바라며 지난 일들을 복기한 끝에 너무나 현실임을 깨닫고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오롯이 나의 결단과 엄청난 용기가 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는 사실에, 하찮아 마땅할 일이지만 이번에도 무시하고 지나가면 나중에 또 터질 문제라는 사실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꼈다. 결국 여름 내에 모든 상황이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매듭지어졌고 어느 순간 이전의 사건과 사람들이 전생의 일처럼 생경해졌지만, 아직은 삐죽 튀어나온 부분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가을은 구멍 숭숭 뚫린 망사 같은 마음이 다 메꿔지고 그 위를 털로 뒤덮을 정도로 안온한 가을이었다. 다정한 사람들에 둘러싸인 유쾌한 날들이 가득했다. 동시에 생일 시즌이라 한 옥타브 넘겨 나사 빠진 날들의 향연이다.  그러니까 원래 내가 살았던 그 모습이 되었다. 아이 교육, 삶의 계획과 방향 등 여전히 고민은 많지만 문제는 역시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초승달을 기다리며 가을밤이 주는 낭만에 빠져있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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