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으로서의 설움에 복받치다
우리는 아침 7시 반부터 이민국 앞에서 줄을 섰다. 현재 이스라엘의 이민국 사무소는 우크라이나에서 넘어온 전쟁 난민들로 북새통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시민권 신청으로 일반 민원 접수 시간이 오전 8시에서 10시까지라고 했다. 실상 민원처리가 안된다는 뜻이다. 언제까지 민원처리를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지난 2년간 코로나사태로 이민국에서 거의 일을 하지 않아 많은 업무가 밀린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 완전히 업무 마비상태가 됐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공문서를 발급받지 못한 유대계 우크라이나인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핑계고, 이스라엘은 본래 행정처리가 정말 엉망 중의 엉망으로 소문이 자자해 현지인들은 간단한 행정처리를 하는데도 정신적 트라우마에 걸릴 지경이다.
나와 매니, 그리고 매니 어머니는 아침 7시 반부터 이민국 앞에서 줄을 섰고 한 시간 뒤 빠른 접수표를 받으려고 이민국 창구로 내달렸다. 하지만 이미 내부는 사람들로 꽉꽉 차있는 상태였다.
한국이라면 업무시간을 늘리거나 공무원을 늘려서라도 민원처리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 스. 라. 엘.
공무원이 갑이다. 그리고 나는 을 중의 을인 외국인이다. 돈이 많으면 변호사를 써서 대신 행정처리를 하거나 빽이 있는 사람들은 지인찬스로 패스트 트랙을 탈 수 있다. 둘 다 없다면 그냥 무작정 처리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거늘.
우리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12시까지 기다리면서 번호판을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번호판은 가끔가다가 작동했고, 대부분 그저 멈춰있었다. 4시간 넘게 민원처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치 익숙하다는 듯 아무도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오직 한국인인 나만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드디어 마주한 이민국의 공무원은 이유 없이 화가 나 있었다. 왜 저렇게 무례하고 화가 난 태도로 서류를 달라, 진짜 커플인지를 증명하는 사진을 달라, 며칟날 파트너 비자를 신청했느냐라고 쏘아대듯 말하는 걸까.
파트너 비자를 신청한 것은 거의 한 달 전이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사진과 서류는 모두 업로드하고 약 30만 원에 달하는 비용도 모두 지불한 상태였다. 혹시 몰라서 만일을 위해서 가져온 사진과 서류를 다시 달라고 한다. 사진은 대여섯 장이 되고, 커플임을 증명할 대화기록과 통화기록도 여러 장인데 전부 다시 달라는 것인가? 말은 안 통하고 상대는 화가 나 있다. 당황스럽다.
일이 잘 안 풀리나 싶었는데 아무 문제 없이 비자연장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매니 : 네가 할 일은 그저 웃으면서 앉아서 사인만 하면 되는 거야
나 : 뭐라고?
매니 :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너는 절대 화를 내서는 안 되고 네 감정을 보여서는 안 돼. 뭐라고 물어보면 그저 웃으면서 네 저는 꼭 이스라엘에 머물고 싶습니다.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뭐지?
정당한 방법으로 비자받으려는데 내가 왜 변호사를 만나야 하며 비자 사무소 직원에게 왜 공손해야 하는 건데?
공무원은 시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에게 뭔 힘이 있어? 그저 매뉴얼대로 일하는 거고 시민의 편의를 봐주는 건데 저 공무원이 왜 나한테 다짜고짜 화를 내고 무례한 거야?
며칠 후 이스라엘은 나를 다시 한번 시험에 들게 했다.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이스라엘 이민국이 우리에게 준 서류 중의 하나를 변호사와 함께 처리해야 했다.
놀랄만한 내용에 하나씩 대답하고 선언하며 사인해야 했다.
1. 나는 마약 중독자가 아닙니다.
2. 나는 정신에 이상이 없습니다.
3. 나는 시민권을 따려는 이유로 결혼을 한 게 아닙니다.
4. 저는 이스라엘에 반대되는 어떤 일에도 가담하지 않겠습니다.
5. 내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이스라엘은 내게 경제적 지원을 해줄 의무가 없습니다.
6. 저는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았고, 이 사람과만 결혼했습니다. 다시 한번, 저는 이 사람과만 결혼했습니다.
7. 그리고 이스라엘 시민권을 따게 되면 원래 국가의 시민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
이 나라가 나에게 왜 이런 선서를 하게 하는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가득한 문서 6장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매니와 어머니는 변호사와 잡담을 시작한 거 같았다. 뭐지? 서로 핸드폰에 사진 보여주고 낄낄 웃으면서 한참을 주고받는 농담...
나는 짜증이 났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엄청난 소외감을 느꼈다. 대체 이 자리에 내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내 부모님도 없고 통역사도 없을뿐더러 내 변호사도 없는 상황에 나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다 끝났어요?' '나 가도 돼? 여기 있기 싫어'
갑자기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다시 서류작성을 시작했다.
서류도 다 안 끝내고 히히 호호 잡담하고 있었던 거다.
'대체 이 사람들 뭐야?'
변호사가 말했다.
"이 문서는 그저 문서일 뿐이야 너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 그냥 형식적인 문서일 뿐이야
너를 여기에 머물게 하기 위한 그냥 형식적인 문서야. 네가 이스라엘에 머물고 싶다면 필요한 과정이야. 다시 한번 물을게, 너 이스라엘에 있고 싶은 거야?"
숨이 턱 막혔다.
사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내가 그것이 형식적인 문서인지 실제 효력을 발휘하는 문서인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당신은 내가 고용한 변호사도 아니지 않은가.
그게 어떤 의미이건 나는 이 나라에 살기 위해 모욕을 감수할 준비가 안되어있다.
이 기분 나쁜 나라에 발디디고 살아야 한다고? 내가 왜? 난 멀쩡한 내 나라가 있는데 이렇게 방어적이고 불쾌한 나라에 살겠다고 이런 모욕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온몸을 뒤덮은 모욕감으로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