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태즈매니아 추억의 소환, 그리고...
2019년 12월 겨울이었다.
새로운 일터에 스카웃 제의를 받은 나는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 필리핀에 일주일간 머물렀고, 이어 호주로 3-4주 간의 휴가를 갔다.
호주로의 첫 방문이었고, 무슨 이유인지 이번에는 아주 먼, 미지의 세계를 가보고 싶었다.
그곳은 바로 태즈매니아! 몇 해 전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지상의 낙원으로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던 그곳이었다. 평화롭던 그 모습이 너무나 기억에 남았던 걸까? 아니면 내셔널지오그래피의 승리라고 해야 할까.
필리핀 마닐라에서 멜버른으로 다시 태즈매니아로 향하는 길은 꽤나 피곤했다. 비행 하루 전날 태풍으로 마닐라 공항이 폐쇄된 데다가 멜버른에 도착해 특별한 공지 없이 새벽부터 몇 시간째 지연되는 저가 항공에 지쳐서 짜증도 낼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비행기가 정상운항하는 맑은 날씨에 이유 없이 지연되는 비행 스케줄을 마냥 바라보고 있는 피곤하고 가난한 여행자의 신세. 유일한 위안이라면 페북에 젯스타의 '만행'을 알리고 친구들에게 몇 마디 따뜻한 코멘트를 듣는 게 전부였다.
호바트, 태즈매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
여기가 지상 낙원이라고 불리는 태즈매니아, 그런 건가? 어느 한적한 유럽 도시의 어딘가에 다다른 듯했고, 높고 푸른 하늘 뻥 뚫린 듯한 광활한 공간감, 여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차가운 바람.
한국의 지독한 겨울을 피해 계절이 정반대인 남반구로 날아왔는데, 한여름은커녕 괴력의 바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대기로 갈기는 탓에 걸으면서 눈도 뜨기 힘든 데다 바람이 몸을 사정없이 밀어내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길거리에 왜 사람이 없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맑은 하늘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대 귀가 먹먹했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벤치에 놓아둔 핸드폰이 날아가 바닥에 뒹굴었다.
다큐멘터리에는 나오지 않았던 지상 낙원의 인정사정없는 거친 바람.
태즈매니아는 낯선 이방인이 일반 교통수단으로는 여행이 불가능해서 약 3박 4일간의 단체 투어를 예약했다. 그리고 투어 가기 하루 전 동네를 둘러볼 겸 여행지에서 늘 하던 대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엄청난 미술관, 모나 MONA (Museum of Old and New Art), 미국과 유럽을 통틀어 가장 근사하고 멋진 미술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나 미술관은 호바트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해서 페리 왕복티켓과 미술관 입장 티켓을 함께 구입해야 한다. 섬처럼 느껴지는 땅 위에 페리가 당도하면 안도 타다오 같은 유명 건축가와 미술가들의 작품이 있다. 미술관의 본 건물은 지표면 밑으로 4층 규모의 땅을 파서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180도 회전하여 지표면 아래로 향해 있는 형태다. 그리고 그 건물의 가장 아래층에 '텅 빈 The Void' 라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칵테일 바가 있다. 모나 미술관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적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토드를 만난 얘기를 하려고 한다.
미술관을 2~3시간 돌아보고 난 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름 모를 칵테일을 한 잔 시켜놓고 바에 앉아 혼자 쉬고 있었다.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고, 잠시 뒤 내게 말을 걸었다.
세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에서 왔어? 혼자 왔니? 너 영어 잘한다."
"그럴 리가?"
"진짜야, 요즘 애들 영어는 너무 이상해서 알아듣기 힘들어", "근데 네 칵테일 맛은 어때?"
"태즈매니아에 혼자 여행 온 거야? 앞으로 여행 계획이 어떻게 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각자 태즈매니아에 혼자 왔고, 나는 약 3-5일간 단체 투어를 하기로 한 것과 토드는 태즈매니아로 휴가 온 호주 브리즈번 사람으로 약 일주일간 차를 렌트해서 솔로 여행을 한다는 등의 정보를 교환했다. 여행 일정은 비슷했지만, 각자의 계획이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고 나는 내일 단체 투어에 합류해야 했다.
잠시 휴식을 끝내고 다시 전시를 관람하려는데, 토드는 본인의 페리시간이 다가오는데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너 지금 페리 못 타면 티켓 다시 사야 하는 거 아니야?"
"뭐, 그냥 버리지 뭐."
전시를 다 봤다는 사람이 딱히 미술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돌아갈 생각도 없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렇게 둘이 미술관을 한 바퀴 다시 돌고 서점과 기념품 샵까지 돌고 나니 마지막 페리 시간이 되었다. 토드는 내가 단체 투어를 취소하고, 본인이 계획한 여행에 내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사람을 덜컥 믿고 미지의 세계를 여행한다는 건 미친 짓 같았다. 그렇게 미술관에서 만난 뒤로 각자 태즈매니아 여행을 마치고 토드는 일터로 돌아갔고, 나는 멜버른으로 이동해서 호주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지막 주에 우리는 다시 브리즈번에서 만났다.
짧다면 짧은 인연이었다. 그 뒤로 종종 안부를 묻고 연락하며 지내다가 작년 말부터 토드가 몇 차례 내 거처를 묻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건지 혹시 다른 나라에 머무는 건 아닌지를 물어보는 투였다.
그러더니 토드가 한국에 온다는 것이었다.
'응? 한국에? 얘도 한류 바람이 들었나?'
"캐나다에 갔다가 서울에 일주일 정도 머물 거고, 네 스케줄이 되면 보면 좋겠어. 그리고 DMZ투어를 예약하려고 하는데 너도 생각 있으면 같이 예약하려고 해."
토드가 오기로 한 건 6개월 후의 일이어서 아주 먼 미래처럼 느껴졌고 마침 토드가 예약하려는 투어 날짜가 정확히 추석 연휴 첫날이어서 별생각 없이 "오케이"해버렸다. 그 뒤로 이래저래 치일 대로 치이면서 살다 보니 불쑥 9월 말, 토드가 오기로 한 일정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그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느라 밤새 이력서를 쓰고, 영어논술이니 영어면접이니 대비해야 했고, 몇 개 없는 연차를 징검다리처럼 사용하면서 전국을 KTX 타고 돌아다녀야 했다. 정신적으로 황폐했고, 무리한 일정으로 컨디션도 좋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질 만큼 너덜 해진 내 상황에서 외국에서 친구가 온다는 게 마냥 반갑기만 하진 않았다.
토드는 내게 몇 가지를 주기적으로 물어봤다. 예를 들면, 태권도 공연을 보고 싶은데 전문적인 공연을 볼 만한 데가 있는지, 코리안 비비큐를 먹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좋은지, 내가 DMZ투어 일정을 잊지는 않았는지,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방법이라든지, 구글맵이 잘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국 사람들의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버스나 지하철에 영어로 된 표지판이나 방송은 나오는지... 혹여 길을 잃지는 않을지 등등
하도 걱정이 많아서 영상통화로 토드를 안정시켜줘야 했다. 사실 귀찮았다. 워낙 순진무구한 순딩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토드에게 핀잔을 줄 순 없었지만 나는 누구를 환대하고 도와줄 여력이 전혀 없었다.
"너 일본도 가봤잖아", "파리도 가봤지?"
"응 일본 여행은 쉽지 않았어. 길도 잃었었고..."
"내 생각엔 일본 여행보다 수월할 거야. 그리고 네가 지방으로 갈 것도 아니잖아.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언제든지 전화하면 되고", "파리에는 유명 관광지에 표지판도 거의 없고 영어 병기도 안 돼있잖아. 서울은 거기보단 훨씬 친절해."
이런저런 굴곡 끝에 우리는 비 오는 날 서울 명동의 한 보쌈집에서 만났다.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호주에서 봤던 얘가 난데없이 서울 한 복판에 와 있다니, 세상에 신기했다.
"내가 올 거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믿었어?"
얘가 그런 말을 했었나? 사실 기억에 없다.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네 존재가 내 앞에 와 있다는 게 신기한 거지 이 바보야.
토드는 한국에 대해 당최 아는 게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동북아시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비빔밥도 모르는 녀석이 코리안비비큐만 외쳐댔다.
'하아... 내가 채식하는 거 까먹었나?'
현지인으로서 유명한 식당을 찾아봐 줄 수는 있지만 같이 와구와구 먹어줄 수는 없었다. 채식한 지 10여 년이 돼 가는데 내 머리에 괜찮은 삼겹살집 목록이 있을 리 없었다.
토드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서울 성곽길을 따라 걷는다며 하루 종일 명동에서 종로 청계천을 지나 삼청동 끝까지 올라가서 명륜동과 동대문으로 내려오는 길을 따라 온전한 도보여행을 즐겼고, 어느 날에는 인왕산 정상에서 사진을 보내거나, 지하철을 타고 명동에서 사당을 거쳐 강남 일대를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