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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자를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어느 병원 교수님의 문자 한통 ▶



오늘도 보호자분은 제게 눈물로 절실하게 요청하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이 환자를 위해 함께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약회사의 의학부에서 가장 크게 일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 업무 중 하나는 EAP (Expanded Access Program)라고 불리는 임상시험용 의약품의 치료 목적 사용 프로그램 업무였다. 


말그대로, 아직 의학적으로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거나 시판승인이 나지 않은 치료제를,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질환의 환자나 기존 모든 치료 시도에 실패하고 더 이상 방법이 없는 희귀, 난치성 질환 혹은 암환자들에게 고려해보게 되는 제도이다. 


공식적으로는 환자에게 처방될 수 없는 신약을 의사의 판단하에 치료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종의 동정적 사용 프로그램이라고도 불린다. 




대학병원 의료진의 전화

임상시험을 마친 신약이 미국과 유럽에서 허가 검토 절차를 마치고 난후, 국내에 도입하기 까지 여전히 1년이 넘게 남은 시점, 대학 병원의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한 환자를 위해 해당 신약의 EAP (임상시험용 의약품의 치료 목적 사용) 사용이 가능하겠느냐는 문의를 받게 된 것이다.  


메디컬부서에 근무하는 우리 팀이 할 수 있는 것은, 주지의 선생님이 최대한 의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임상개발과정에서 쌓아왔던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을 브리핑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여 설명해드리는 일이었다. 최종 판단은 결국 교수님이 내리시게 되고, 환자의 동의를 받게 되면, 비로서 우리 팀은 글로벌 본사의 마지막 승인을 받아내기 위한 미팅과 교수님의 의견을 전달하며, 필요한 서류들을 꾸려나갔다.  이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교수님, 글로벌 본사, 규제기관 (식약처) 사이의 과학적, 의학적, 절차적 질의응답들이 오고가며, 메디컬팀은 이에 대한 자료와 정보들로 교수님을 지원하고, 각 부처간의 담당자들이 원활이 소통할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을 가이드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모든 환자들이 EAP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진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아직 임상적 유효성과 안전성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신약이기에, 해당 환자가 임상시험의 선정기준에 부합하지 않다면, 해당 약제의 제공은 어려워질 수 있었다. 우리 팀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출처: https://www.mfds.go.kr/brd/m_1060/view.do?seq=14576&srchFr=&srchTo=&srchWord=&srchTp=&itm_seq_1=0&itm_seq_2=0&multi_itm_seq=0&company_cd=&company_nm=&page=22





오늘도 보호자분은 제게 눈물로 절실하게 요청하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이 환자를 위해 함께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처음 이 업무를 하며, 첫 승인을 받아내는 과정은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기에 메디컬팀도 의료진도 너무나 생소하고 복잡한 이 절차 속에 글로벌 본사와의 소통을 준비하며, 지치기도 하지만, 그때, 교수님이 남겨준 문자는 지금도 일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울림을 남긴다.


해당 치료제가 본사에서 발송되어, 국내 의약품 창고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첫 투여일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던 날, 회사에서도 모두가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비록 회사에서는 임상개발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환자들을 직접 만나게 되는 상황은 없기 때문에, 비록 어떤 환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작은 희망을 드릴 수 있었다는 보람은 이 업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한다. 


시간이 지나 나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며, 더 이상 교수님으로 부터 환자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지금은 시판 승인을 받은 이 약제가 부디 안전하게 환자분의 미래를 그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2021년 한 보고에 따르면, 2011년~2020년 기간 동안 신약의 시판 승인은 임상 진입으로부터 10년~15년이 소요되었고, 해당 기간에 260억 달러 (약 30조 원)의 비용이 소요되며, 그나마 시판 승인 성공률은 7.9%로 나타났다. 이 긴 여정을 환자가 마냥 기다리기는 어렵다. 새로운 치료에 참여하기 위한 신약의 임상시험이 모든 나라에서 진행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임상시험도 환자의 접근성이 항상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EAP 프로그램은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면서 마땅한 대안이 없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의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인도주의적인 제도로 기능한다. 한국 역시, 약사법 제34조 (임상시험의 계획 승인 등)를 통해서 식약처장의 승인하에 특수한 경우, 새로운 치료제를 임상시험이 아닌 다른 용도 (치료 목적)로 사용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일의 의미

바이오 헬스케어 산업, 신약개발 경쟁과 비즈니스 환경, 미래 먹거리라 불리는 이 분야에, 많은 관심과 투자금들이 투입되고 있다. 화려한 기술과 기전들이 하루가 다르게 선보이는 관심 속에, 많은 사람들이 산업으로써의 성장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메디컬팀에 근무하며 좋은 것은, 그 산업의 본질인 “환자”에 대한 일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가끔, 제약회사의 민낯, 리베이트, 글로벌 거대 제약사들의 횡포와 같이 제약사들을 너무 부정적인 프레임으로 씌우려는 기사들을 본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 함께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던 메디컬팀, 그리고 임상팀들을 보며,며이들도 그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출퇴근 회사원이면서, 그래도 다른 업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 환자를 위해 일한다는 “업의 가치”를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점을 이렇게 남기고 싶다. 직접 환자를 보며 진료를 하는 의사가 아니라고 해서 환자를 생각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PS

2019년 의협신문에 "소풍 가는 날"이라는 웹툰이 실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EAP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지 짐작해본다. 한번 참고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https://www.doctor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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