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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구름 Dec 12. 2022

어느날, 친구가 내게
[검은 구멍]을 이야기했다  

너를 이해할 수도 없고 채워줄 수도 없지만...


















 회사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었던 밤이었다. 갑자기 친구한테 뜻밖의 전화가 왔다. 목소리는 너무 가라 앉았고 내가 답을 해줄 수 없는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친구의 이름을 밝힐 것도 아니지만 친구의 문제를 글로 자세히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사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 문제들이 아니라 친구의 말이 었다.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어"


 그때 나는 제주도에서 게스트호텔에 묵고 있었다. 바깥에서 전화를 받기에는 날씨가 차가워서 복도에서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보니 나의 '아는 척'하는 이야기들은 접어두고, 친구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정말 닮았고 우리의 우울함과 깊음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었구나. 


 나는 우울한 일이 있을 때만 그 우울함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해결할지,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를 원망할지 생각한다. 그런데 친구의 가슴에는 언제나 구멍이 있다고 했다. 재밌는 일이 있어서 호호호 깔깔깔 웃을 수 있지만 그 구멍을 메울 수 는 없었다고 했다. 긍정왕답게 어떤 시련이 와도 씩씩하게 헤쳐나가던 그녀는 그 구멍도 벗삼아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몸도 아프고 간절히 희망해왔던 일도 꺾일 위기에 처하자 구멍이 그녀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냥 주저앉고 울고만 싶고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은 순간에 내게 전화한 것이다. 그 전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구나. 나의 어떤 말도 너에게는 해답이 되지 않겠구나.



"경주에 가자. 자전거 여행을 가자"


친구에게 내가 주고 싶었던 건 '나의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건강한 나' 와 함께할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일본 만화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이라는 만화를 보면 아리마와 유키노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키노는 귀여운 허세가 있어서 학교에서는 '완벽한 모범생'을 연기하고 집에서는 털털한 이중적인 친구였지만 유키노와 달리 아리마의 이중성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어린시절부터 학대받아 온 아리마는 믿는다. 친부모조차 사랑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유키노가 본다면 버림받을 것으로. 철저히 진짜 자기자신의 감정은 숨기고 완벽한 아리마를 연기한다. 



 완전한 어둠이었던 아리마, 누구보다 환했던 유키노. 지금도 기억나는 만화의 한 컷이 있다. 아리마가 

검은 어둠에 갇혀있고  그 반대쪽 환한 빛쪽에서 유키노가 손을 내민다.  정확한 대사가 기억나진 않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빛은 어둠을 이해할 수 없어도 ... 어둠을 밝힐 수 있어'



 나도 이런 사람을 경험해봤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나의 남편이다. 남편은 자기 입으로는 자기가 엄청 예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렇게 단순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철학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골똘히 생각하기 보다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테니스를 가고 아침에 뭘 먹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지금 자신은 숲을 산책하고 싶은지 호수를 거닐고 싶은 건지 세심하게 살펴본다. 굳이 '지금 이순간을 살아라'같은 책을 읽지 않아도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 덕분에 남편과 살면서 나도 좀 더 단순하고 건강해졌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친구와 함께하고 싶었다. 


친구 검은 구멍을 애써  해석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 구멍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널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너를 채워줄 수도 없지만 

너와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함께 달릴 수 있어'


친구에게 짧은 순간이더라도

그 검은 구멍에 지지 않을 

나를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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