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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립 Mar 24. 2021

정장과 츄리닝 사이

옷과 일

파리, 스타시옹 F

오래된 철도역을 개조해서 만든 파리의 공유 오피스 스타시옹 F를 갔을 때의 일이다. 이곳엔 라 펠리시타라는 푸드코트가 있는데, 나는 이 곳에서 트러플 파스타와 하몽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옆 테이블에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있었다.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인 것 같았다. 여덟명 쯤 되는 직장인 무리가 모두 검은색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어두운 계열의 넥타이를 단정히 멨다. 심지어 메뉴도 하나로 통일해서 같은 것을 먹었다. 프랑스 스타트업의 근거지를 표방하는 스타시옹 F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쿄 여행을 갔을 때, 이른 아침 지하철에서 마주했던 거대한 검은 양복 직장인 무리가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이런 게 문화인가.




화장품 회사를 10년 째 다니고 있다. 외국계 기업같은 이름을 가진 이 회사는, 수평적 문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진 것으로 외부에 알려져있다. 그래서인지 업황이 좋지 않은 현재도 '대학생들이 가고 싶은 기업' 순위에서 여전히 10위권 내를 유지한다. 현재 기준으로만 보자면 기업의 이미지와 실상이 그래도 절반쯤은 겹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곳에 발을 담근 2012년에는 달랐다.


당시 기업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옷이다. 첫 출근을 했던 그 날 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 매일 정장을 입고 일했다. 내가 속했던 인사부서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된 마케팅 몇 개 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부서가 그랬다. 세 벌 정도의 정장을 번갈아가며 입었는데, 그 때 입었던 옷들 대부분은 엉덩이가 맨질맨질해지고 무릎 뒷쪽에 펴지지 않는 주름이 잡혔다.


내 처지도 그랬다. 정장 바지의 무릎 안 쪽처럼 구겨져서 펴질 줄을 몰랐다. 일보다 힘든 건 분위기였다. 블랙, 그레이, 네이비 톤으로 정돈된 정장처럼,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여섯시가 넘어도 사무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슬그머니 퇴근하는 사람도, 당당하게 팀장에게 퇴근을 알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퇴근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7시까지 제공되는 사내 식당의 저녁식사를 거르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이유는 그저 '부문장을 기다리는 실장을 기다리는 팀장을 기다리다 시간이 늦어서'였다. 직속상사에게 "저녁 식사는 하고 가시나요?"라고 물어보는 것조차 조심스럽던 시절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 뒤로 개인은 감추어졌다. 일도 그랬다. 모든 일은 위에서 아래로 툭, 떨어졌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고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을 지지하는 데이터를 조작없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사실 분석이라는 건 데이터를 어떻게 분류하고, 어디부터 어디까지 보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시간과 에너지만 쏟으면 안되는 건 없었다.


여름이 오면 사내 인트라넷에 공지가 떴다. 타이없는 세미정장을 허하노라.


회사느님의 관대함이란 이런 것인가. 근로계약서에도, 단체협약에도 복장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회사는 복장의 기준을 제시했고 사람들은 따랐다. 나는 보통 밝은 계열의 와이셔츠에 면바지를 매치했다. 그렇게 여름이 되면 사람들의 복장은 그래도 조금 자유로워지고, 색깔도 다양해졌다. 휴가 시즌이 겹치면서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분위기도 자연스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깐깐한 사람들은 있었다. 한여름의 회사는 생각보다 추워서 나는 꼭 가디건을 챙겨다녔다. 자리에서 일할 때는 보통 가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지원부서의 한 임원을 만났다. 한 여름에도 풀정장에 타이까지 갖춰입은 그 임원은 나를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더니, "가디건은 잠그고 다녀야지. 너풀거리는 건 좀 그렇네." 잔소리를 하고선 쿨하게 떠났다. 가디건을 잠그고 다니라니. 단추가 열린 가디건과 잠긴 가디건은 뭐가 다른거지. 너풀거리는 가디건 자락이 중요문서를 휘적거려서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잘못되는 상상이라도 한 걸까. 혹시나 싶어 회사의 공지를 살폈지만 가디건에 대한 안내 사항 같은 건 없었다. 있더라도 받아들이진 못했겠지만.


201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조금씩 분위기는 달라졌다. 화장품 시장이 중국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회사가 커지면서 신입, 경력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율출근제가 시행되고 초과근로수당도 제도화되었다. 그러는 동안 직원들의 옷차림도 변해갔다. 서로의 몸에서 색깔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 각이 잡혔던 경직된 어깨는 부드러운 재질로 둥글게 떨어졌다. 꾸준한 운동으로 날렵하게 다져진 종아리, 불주사 자국이 선명한 살색 팔, 매끈하게 빠진 주황색 머리카락, 마스큘린하게 잘 기른 턱수염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빡빡한 벨트 위로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와 그 위로 벌어진 흰색 와이셔츠, 고급스러운 옷감이 무색한 애매한 루즈핏 정장을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옷차림이 변하면서 기업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회사의 상하관계는 굳건하지만, 상호 존칭의 님문화가 잘 정착되었고 일반 사원이 전무에게 질문하고 제안하는 일도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이런 변화도 부서별로 차이는 있다. 어떤 부서에서는 여전히 최소 세미정장 수준의 단정함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부서들은 조직문화도 경직되고 수직적인 경향이 있다.


어쨋든 내가 속한 마케팅 조직은 여러면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이제는 오히려 풀정장을 입고 출근하면 어색하고 뻘쭘한 수준이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예전에 입었던 정장들이 쓸모없게 되어서 최근에 이사를 하며 상당수를 정리해야 했다. 얼마 전에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S회계법인 사람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시커먼 정장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기업에 견학을 온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각이 잘 잡힌 정장을 갖춰 입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단정함 -물론, 기준은 너무나도 주관적이어서 도통 경계를 그을 수는 없지만- 을 유지해야 긴장감이 생기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게다가 아직 TPO에 대한 인식은 남아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는 옷장에 쳐박힌 정장을 꺼내야 할 일이 있다.


그래도 10년의 짧은 시간에 옷차림과 함께 변해가는 기업문화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장을 입지 않아도 회사는 잘만 굴러가는데 10년 전에는 왜 그랬을까. 매일 야근하지 않아도 -심지어 재택근무를 해도- 일은 다 할 수 있는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동기 C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여름엔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우리팀 J님은 2주 전까지만 해도 빨간 머리였다. 이제는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쿨하게 일에만 집중하는 일터가 되었다.


옷과 일은 어떻게 보면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오히려 보이는 것 -외형적인 것- 의 통제가 보이지 않는 것 -일의 자율성, 수평적 기업문화- 의 가능성까지 함께 제약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나는 관성에 얽메인 보수적인 사람이라 올 여름에도 반바지는 입지 못할 것 같지만, 이런 직장 내의 엔트로피가 지속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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