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립 Oct 30. 2023

[착륙] 겁쟁이의 비행

이륙과 착륙

 솔직하게 고백부터 하고 시작하겠다. 나는 겁쟁이다.


 겁쟁이의 정체성을 처음 깨달은 건 아주 어릴 때인데,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이거나 유치원생이었던 것 같다. 학급 소풍으로 놀이공원을 갔다. 나는 반장이거나 부반장, 여하튼 몇 십명의 대표같은 포지션이었고 선생님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들이 온갖 놀이기구를 타며 재밌게 노는 동안, 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놀이공원을 걸어다녔다. 빙글빙글 돌고 붕붕 떠오르는 놀이기구들이 어찌나 무서워 보이던지, 메리고라운드가 아닌 어떤 것도 탈 엄두가 안났다. 당시엔 부끄럽다는 생각도 못했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당시의 기억이 갈수록 진해져서 겁쟁이로서의 내 정체성을 증명하는 최초의 사건으로 남았다.


 아내와의 연애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에버랜드나 롯데월드를 가야만 했다. 놀이기구가 무서웠지만, 무섭지 않은 척 했다. 죽을 수 있는 위험에 돈을 지불한다는게 그때도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담담한 척 놀이공원 데이트를 했다. 그것은 순전히 여자친구의 환심을 사려는 객기에 불과했는데, 그마저도 금방 들통이 났다. 언젠가부터 아내와 나의 사이에 놀이공원 데이트는 옵션에서 제외되었다. 지금도 아내는 날이 따뜻해지면 '랜드'와 '월드'를 외치지만, 나는 딴청을 피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행기다. 20대 후반부터 알게 된 여행의 매력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남북분단의 비극은 나를 끝없는 비행으로 내몰았다. 오호 통재라! 게다가 회사에서는 의도치 않게 글로벌 업무가 많았다. 출장으로 여행으로 매년 두달에 한번은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비행을 할 때마다, 나는 삶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다짐을 한다. 이번에도 살아남는다면, 더 열심히 현재를 곱씹으며 살아야지. 충실하게 꽉꽉 채워서 하루를 보내야지.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중에서 폭발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게 나뿐만은 아니겠지...?)


 1시간의 비행과 13시간의 비행은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착륙하는 순간, 비행은 끝난다. 살았구나. 미지의 대륙에서 여행을 시작한다는 기쁨보다 이번 비행에서도 무사히 생존의 끈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안도의 감정이 크다. 아 살았다!


 강아지 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한 뒤, 비행기를 거의 타지 않았다. 한 두번의 제주행 비행이 전부였다. 벌써 3년이다. 요즘은 하루 두번씩 반려견을 산책시킬 때마다 "이번 산책도 무사히 마치고 우리 세 식구 집으로 잘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큼지막한 비행 뒤의 다행스러움을 작게 나누어서 매일 한모금씩 마시는 기분이다.


 겁쟁이들이야말로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그래보이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현재를 지키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들. 바닥에 착 달라붙은 현실에 투덜거려도 사실은 그 땅바닥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착륙이 누구보다 다행스러운 사람들.

매거진의 이전글 [이륙] 비행기로 5시간 만에 도착한 제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