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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추 Jun 29. 2024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앙코르 와트 방문한 날(1)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필리핀 여행기(7)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 네 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전날 온라인으로 앙코르 패스 7일권을 미리 끊어 놓고, 비교적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다음날이면 드디어 앙코르 와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잠을 계속 설치다가, 이렇게 제대로 못 잔 채 무리해서 앙코르 와트를 보러 갈 바에야 일정을 하루 미루자 싶어서 결국 휴대폰 알람을 꺼버렸다. 그런데 오늘 꼭 다녀오라는 하늘의 계시인지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딱 네 시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다녀오자 싶어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네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에 숙소에서 나왔다.


  앙코르 와트까지는 시내에서 거리가 꽤 되는데, 나는 캄보디아의 교통 애플리케이션인 PassAPP으로 툭툭을 불러 타고 가기로 했다.(그랩도 이용 가능하지만 패스앱으로 예약하는 게 보다 저렴하다.) 예약하자마자 바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툭툭 하나가 3분도 안 돼서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앙코르 와트로 일출 보러 가는 관광객들이 많은지 거리에 사람도, 차도 꽤 많이 보였다. 어두워서 바깥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신비롭고 설레는 기분으로 15분 여를 달려 4시 50분경 앙코르 와트 서쪽 출입문 앞에 도착했다.


 직원에게 온라인 패스를 보여주고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니, 곧고 넓은 길이 일자로 쭉 나있었다. 앞서 가는 관광객들을 따라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앞으로 걸어가다 보니 넓은 강과 그 위를 가로지리는 다리 하나가 보였다. 앙코르 와트를 둘러싸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깊고 넓은 해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큰 규모 때문에 해자가 아닌 자연적으로 생긴 강이나 호수처럼 보였다. 강(이 아닌 해자) 가운데 놓여있던 다리는 무지개다리라는 이름으로, 그 다리를 건너서 앙코르 와트 1층 구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앙코르 와트 뒤편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하나 있는데, 늦게 도착하면 좋은 자리를 못 얻을까 봐 다리 위 수많은 물웅덩이들을 피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걸어가다 보니 다리가 끝나는 지점 바로 앞에 있는 앙코르 와트의 서쪽 정문 윤곽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일단 일출 장소까지 가는 것이 시급해 서쪽 정문의 감상은 일출 뒤로 미뤄두고, 정문을 빠르게 지나 양쪽에 나란히 파여있다는 사각형의 연못 두 개를 찾아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걸었던 것보다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연못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연못 중 오른쪽 연못 앞쪽 편에서 일출을 볼 때 각도상 더 아름다운 일출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키가 큰 두 개의 나무 사이로 앙코르 와트의 아름다운 탑 다섯 개가 나란하게 온전히 보이는 지점이 명당 중의 명당이다. 처음에는 어느 자리를 잡아야 할지 알지 못해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는데, 단체 관광객을 이끄는 가이드 한 명이 바로 그 명당에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그쪽으로 갔을 땐 이미 나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그 오른편 빈 공간에 자리를 잡고 다가올 일출을 느긋히 기다리기로 했다. 앙코르 와트의 탑들 중 오른쪽 두 개가 나무에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첫 시도에 이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5시 40분으로 예정된 그날의 일출 시각이 점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관광객들 숫자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의 좌우뒤쪽도 다른 관광객들로 가득 찼고, 나도 그들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대감으로 상기된 얼굴로 일출의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거나 함께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갑자기 서양인 여자 두 명이 내 앞을 비집고 들어와 내 시야를 방해하는 곳에 억지로 자리를 잡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중 한 명은 나보다 키도 훨씬 컸다. 순간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와도 같은 이곳에서, 사이공과 프놈펜을 거쳐 순수 이동 시간만 24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이곳에서, 50만 원 상당의 소매치기를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바로 이곳에서, 제대로 된 관람 시작도 전에 평점심을 잃고 기분을 잡쳤다는 것이 더 짜증이 났다. 이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조용하고 평온하게, 이 신비롭고 성스러운 장소를 마음껏 눈에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짓을 한 그들에게 나의 짧은 영어로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어렵게 잡은 자리를 포기하고 사람들 가장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등바등 조바심 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좋은 자리를 사수하는 것보다, 그냥 다 내려놓고 마음 편히 수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랑 함께 감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포기와 합리화를 빨리 하면 마음도 빨리 편해진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다 보니, 기다렸던 5시 40분이 되었다. 거기서 몇 분 더 흘렀지만 앙코르 와트 뒤편의 하늘만 빨갛게 밝아질 뿐 해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구나, 이렇게 나의 첫 앙코르 와트에서의 일출관람 시도가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미련 없이 자리를 뜨고 급하게 자리 잡으러 오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무지개다리와 드넓은 해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족히 열 명은 되는 수의 가이드, 툭툭기사, 사진기사 등의 호객을 만났다. 호객을 뿌리치며 해자가 있는 곳에 거의 도착했을 때, 주위가 환해져 뒤돌아보니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구름에 숨어있던 해가 언제 고개를 내밀었는지 환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빨리 미련을 버린 것을 후회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오전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해자 뒤에서 본 앙코르 와트에서의 첫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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