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다 재보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힘들거니와 내 인생에서 실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결정도 많지 않았다.
며칠째 고민만 하다가 가까운 친구 중에 해외여행 경험이 풍부하고 유튜브 채널도 함께 운영하는 친구 A와 맥주를 한 잔 하게 됐다. 만나기로 약속을 잡을 때부터 이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처음 한 달 살기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난 후 수시로 그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나를 찾아왔는데, 설렘 뒤엔 당연하단 듯이 치앙마이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곤 했다. 구체적인 출입국 날짜와 저렴한 항공편, 간단한 태국의 역사와 치앙마이의 지역별 특징, 관광 명소, 가보면 좋을 식당, 나에게 맞는 숙소 등 찾으면 찾을수록 더 가고 싶어 졌고 가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최적의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심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통용되는 인식으로는 나는 치앙마이에 가면 안 됐다. 내 나이에 맞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 가족과 나라의 발전에 보탬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고심 속에서 그런 인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당당히 걸어 나가고 있는 A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뭔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8월 16일 수요일 오후 6시에 약속장소인 맥주집에서 A를 만났다. 술을 마시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한국의 8월 답게 이 날도 매우 무더웠기 때문에 맥주가 마치 물인 양 술술 들어갔다. 그렇게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슬슬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당장 다음 주에 치앙마이에 한 달 살기 하러 가기로 했다", "이미 비행기표도 다 예매해 놨다". 왜 준비했던 말 대신 이런 말이 나왔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A에게 뭔가 대담하고 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나의 내면의 숨겨져 있던 허세가 술기운에 힘입어 실력 행사를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산전수전 다 겪은 A도 이 말을 듣고는 놀란 눈치였다. 물론 나도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자리를 여러 번 옮겨가며 태국에 대한 이야기, A가 마흔 몇 개국을 여행하며 겪었던 에피소드 등을 흥겹게 이야기했고,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한 채 11시가 되기 전 그날의 즐거웠던 자리를 마무리했다. A를 보내고 자취방에 돌아온 뒤 내가 가장 서둘러했던 것은 출국을 위한 항공권을 예매하는 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장 빠른 일자에 출발하자 싶어 그다음 주 월요일(8월 21일) 오후 8시 30분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방콕행 항공권을 선택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로 인해 한동안 정체 중이던 한 달 살기 준비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고민했던 가족에게 알리는 문제는 일단 뒷전이었다.
그 주 토·일요일 내내 다른 지역에서 개인적인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 달 살기 출발 전까지 나에게 남은 시간은 만 3일 정도였다. 그 사이에 한국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모두 마무리 지어야 했다. 막상 최종 결정을 하고 나니 한 달 살기에 대한 나의 감정은 설렘과 기대에서 초조와 불안으로 바뀌어갔다. 생각해 보면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워낙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5주가량이나 되는 기간이다 보니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