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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fille Jan 13. 2024

<몽소 빵집의 소녀>와 스물한 살의 혜화동로터리





<La Boulangère de Monceau>(1962), Eric Rohmer


<몽소 빵집의 소녀>(1962), 에릭 로메르



발췌 영상 (프랑스어 자막 & 한국어 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O9voKzbmEMg





"Et puis c'était une façon comme une autre, non seulement d'occuper mon temps mais de me venger de Sylvie et de son absence.

"게다가 빵집에 가는 건 시간 때우기를 넘어 실비와 그녀의 부재를 복수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Toutefois cette vengeance me semblait assez indigne de moi.

그러나 이런 복수 또한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Et c'est contre la boulangère elle-même que je finissais par tourner mon irritation."

결국 내 노여움은 빵집 여자를 향하게 되었다"






 스물한 살, 프랑스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한다며, 휴학하고 카페에서 일하던 시기가 있었다. 카페는 혜화역 4번 출구 근처에 있었고,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카페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단골손님들에게 커피를 내드리고, 시간이 나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은행 직원들도 자주 왔다.



 당시 남자친구는 군대에 있었는데, 난 그와 매일 통화하면서도 가끔 오는 신참 은행원 아저씨가 괜히 신경 쓰였다. 이십 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였던 그는 나이 많은 선배들 사이에서 더욱 앳되고 풋풋했다. 늘 단정한 차림에 적당히 넉살 좋고 상냥했다.



 그는 혼자 오기도 했다. 커피를 앞에 두고, 휴대폰을 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공간에 있으면, 카페에 온에어 불이 들어온 것 마냥 들뜬 긴장감이 흘렀다. 그에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느꼈다.. 언젠가 한 번, 그는 카페에서 가장 맛있는 브라우니 쿠키를 사서 내게 같이 먹자고 나눠 줬다. 이렇게 약간의 커뮤니케이션이라도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 뭐지?'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뭐지?'



 당시 난 돈을 모으고 있었고, 늘 다이어트 중이었기 때문에 점심은 간단하게 해결했다. 몇 번은 혜화동 로터리의 한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나 사과를 먹으며 길 건너 아저씨가 다니는 은행을 바라봤다. 그러고 있으면, 이 가벼운 마음을 비교할 바가 전혀 아니었지만서도, 강 건너의 닿을 수 없는 데이지를 그리워하는 개츠비가 생각나서 웃었다. 밖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포근한, 햇빛 좋은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원 아저씨가 혼자 와서 커피를 시켰다. 여느 때처럼 도장을 찍어달라고 쿠폰을 건네는데, 우리 카페 쿠폰이 아니었다. 다른 카페 쿠폰이었다. 그 순간, 그는 분명 여기에서만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닐 것이며, 나에게만 싱글벙글한 사람이 아닐 것이고, 나처럼 어린 종업원을 괜히 설레게 하고 싶어 하는 영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 간 남자친구를 두고도 은행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 나도 우스웠지만, 아저씨가 너무 괘씸해졌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었고, 모든 게 내 머릿속에서만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후 난 아저씨에게 약간 새침해졌을 뿐이었을 거다.



 그 시절에 만난 영화가 에릭 로메르의 단편 <몽소 빵집의 소녀>다. 갤러리에서 일하는 엘리트 부르주아 실비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동안, 빵집 소녀와 은근한 플러팅을 즐기는 남자의 이야기. 그에게 실비와 빵집 소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어서, 빵집 소녀는 실비를 절대 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빵집 소녀는 그걸 몰랐다. 그리고 남자는 순진한 착각에 빠진 소녀에게 벌을 주고 싶어 했다. 다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보이지 않는 경계에 의해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차갑고 영악한 인간의 심리를 그린 영화였다.



 영화 속 남자가 빵집 소녀에게 자기가 사줄 테니 사블레 하나 먹으라고 하는 것과, 은행 아저씨가 내게 준 브라우니 쿠키는 자연스레 포개어졌다. 그와 나의 신분과 나이 차이 같은 것도. 그리고 난 어쩌면 그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고 착각하고, 그런 로맨스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빵집 소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좀 분했다.



혼자 설레고 들떴다가, 괘씸하다고 몰아붙였다가, 애초에 아무도 없었지만 떠났다. 고요해지면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이유를 찾고. 그땐 그렇게 계속 짱구를 굴리면서 단조로운 삶을 조금이라도 흥미롭게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어쨌든. 한 인물의 머릿속에 지나갔던 모든 상상, 설렘, 자기 합리화 등 그 모든 내면의 생각들이 영화가 되다니.  <몽소 빵집의 소녀>은 선하지 않았지만, 솔직했고 인간적이었다. 이런 영악한 인간을 풍자하여 담아낸 감독은, 이 모든 걸 초월해서 사람들을 참 귀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https://www.instagram.com/bonne.etoil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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