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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May 14. 2022

적당히 귀를 닫고, 유난 떨며 살자

욕심 많은 여자가 갖춰야 할 덕목 

대학원 졸업 후 이제 이제 2년차 워킹맘으로서 느끼는 점은 '외롭다'와 '참 행복하다'라는 점이다. 외로운 이유는 편하게 마음을 터놓고 워킹맘의 고충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참 행복한 이유는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대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날을 세우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는 점점 더 적어지는 것 같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결혼과 출산 이후로 정말 많은 인간관계가 정리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24살때부터 36살까지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36살부터 41살까지 '경력 단절(정확히 말하면 육아 및 대학원 재학 기간)'의 기간을 가져보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난 후에야, 북적거리던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정리가 됐다. 내가 5년만에 다시 회사에 출근한다고 소식을 전했을 때, 순간적으로 굳은 표정과 침묵을 보여주던 몇몇 지인들의 반응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물론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정말 소수였다. 심지어 내 취업 소식을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아 그대로 흐지부지 되어버린 단톡방도 있었다. 


지금은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 가끔씩 안부를 가장한 질문을 받는다.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느냐고. 출퇴근은 안하고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한다고 대답하면, 금새 대화가 끝나버린다. 언제 한번 보자고 상투적인 인사를 하지만, 언제 어디서 보자는 구체적인 약속은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는다.


이제는 이런 일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끔은 상처받는다.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고, 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내가 만약 지금보다 좀더 어린 나이였다면, 내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자신이 오래 알아오던 친구, 가까운 지인의 변화와 발전을 기꺼이 기뻐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에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반발(?)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너도 드디어 회사 그만둘 때가 됐구나, 같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부터 첫 부작용(!)이 시작되었다. 정말 온갖 소리를 다 들었다. 번역 그거 한물 갔다고. AI가 다 해주는 세상이 올 거라고. 돈도 얼마 못 벌더라, 나이 마흔 넘어 졸업해서 통역할 수 있겠냐, 회사에서 받아주겠냐, 이제 시작해서 언제 번역가 될거냐...등등등. 


좀더 구체적으로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된다, 세 살까지 엄마가 붙어서 안키우면 어떻게(?) 된다더라, 정서 불안이 온다더라, 돈 몇 푼이나 번다고 그 고생을 하냐, 너가 공부하는 동안 남편이 얼마나 힘들겠냐, 그걸 다 이해해주는 남편에게 감사해라?....등등등.


만약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삶이 있다, 계속 발전하고 싶다, 성취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귀를 잘 닫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남의 말에는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들은 내 인생을 나만큼 귀하게 여기고, 나만큼 깊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라면, 게다가 결혼한 여자라면 더더욱 필요한 덕목이다. 


귀를 적당히 닫고 살아도, 숨 쉬듯이 듣게 되는게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간섭과 참견이다. 꼭 말로 듣는 것만은 아니다. 눈빛으로, 사회적인 분위기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하고 보고 들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우리는 크고 작은 은근한 압박을 받는다. 사회에서 일을 하고 인정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남편의 입장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똑같은 육아를 해도 남편이 하면 너무나 '자상한 아빠'가 되고, 내가 하면 그냥 엄마로서 '기본'이 된다. 


사실 결혼 전에는 이러한 큰 물의 흐름을 실감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은게 뭐? 그냥 지금 하는 것처럼 나만 노력하면 되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잠깐 정신을 놓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물줄기에 휩쓸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둥둥 떠내려 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나 혼자만 노력할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든든한 지원군 확보와 나 자신의 멘탈 관리, 아이의 건강, 물리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시간 및 경제적인 여건 등등 신경써야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커다란 물의 흐름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해야 한다. 그게 명확하지 않으면 이 세찬 물줄기에 휩쓸리기 쉽고, 그걸 거슬러가며 무언가를 계속 해 나가야 할만한 명분과 근성을 스스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미혼이라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에 무려 '명분'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도 그랬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모든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에게는 더더욱 '유난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 석사 학위가 종잇장 한 장일 뿐이라고, 실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에게는 그 종잇장 한 장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그토록 지겹다고, 때려치우고 싶다고 했던 회사 경력과 인맥도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막상 새로운 출발선에 서보니, 지나온 나의 모든 흔적이 소중한 경력이 되고 발판이 되었다. 


마흔이 넘어서도 하고 있는 일은 나의 정체성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조금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 공부와 일을 손에서 놓으면 안된다. 시작은 미약했을 지라도 꾸준히 이어가는 이 일은 또 10년 후, 20년 후에 다른 세상의 문을 열게 해줄 것이다.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너 참 유난스럽다,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니 같은 이야기를 종종 들어오며 살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이제야 비로소 칭찬으로 들린다.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사서 하고, 주변의 기대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누가 뭐래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묵묵히 향해 가며 인생 참 피곤하게 사는, 오늘도 유난 떨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욕심 많은 여자들과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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