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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Sep 03. 2022

아이도 부모를 키운다

놀이터 붙박이 2년차 엄마의 고찰 

직업을 바꾸고 자리를 잡는 동안 내내 아기였던 아이가 마침내 유치원에 들어가자, 이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미있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게 되었다. 바로 아이 엄마들과의 친분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친정 부모님께서 육아를 전적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아이의 등원 및 하원 후에 다른 엄마들과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프리랜서로 자리잡은 후, 다시 육아를 도맡게 되면서 서서히 다른 엄마들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처음에는 다른 엄마들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일과 육아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피곤하고 힘들어서,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새로운 인간관계는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한지 오래된 터였다. 심지어 기존의 친분마저도 정리하거나 '거리두기'하던 상태였기에 또다른 누군가와, 그것도 같은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익명의 누군가로 남아있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 상태와는 상관없이, 내 정체성은 이미 'oo엄마'였다. 매일 오전 오후로 같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같은 아이들, 같은 아이 엄마들과 놀이터에서 자주 어울려 놀다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나는 내향적인 성격답게, 처음에는 예의만 차리고 눈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다. 내가 아이 육아를 맡게 되었을 시점에는 이미 기존에 친한 엄마들 무리가 형성된 상태였는데, 자발적으로 혼자 있고 싶어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더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보니 자연스레 친분이 형성되었다. 나처럼 사람들 무리에서 섬처럼 혼자 서 계시던 엄마 몇분이 먼저 다가와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적극적인 분도 있었고, 서로 수줍어하며 몇번 이야기하다가 서서히 가까워진 분도 있었다. 


아이 엄마들과의 관계는 어찌보면 참 신기한 관계다. '나'를 중심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중심으로 만나는 관계이기 때문에 '누구누구 엄마'라는 사실 외에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전혀 없다. 이제까지 학교나 사회에서 쌓는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의 배경을 아는 상태에서 만난다. 학교나 회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처음 만나면 나이나 직업을 묻거나 같은 취미, 또는 같이 공부하는 주제로 모이는 등 어찌됐든 '나' 개인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아이 엄마들과의 관계에서는 '나'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엄마이고, '누구의 엄마'라는 사실이 곧 명함이다. 아무도 내 나이나 직업에 대해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주로 아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학원 정보나 유치원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마저도 상당히 산만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놀이터에서 눈은 계속 아이를 주시하거나 시시때때로 아이 시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거나 누군가 인사도 없이 홀연히 가버려도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해한다. 아이가 갑자기 넘어지거나 친구와 싸워서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흔하고, 갑자기 달려와 쉬야(!)가 마렵다거나 간식을 요구하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엄마들 사이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적당히 가까운 직장 동료같은 사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철저히 아이에 따라 가까워지기도 했다가 한순간 멀어질 수도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가벼운 친분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 편하다. 


사실 엄마들 사이 뿐만 아니라, 서른 이후로 맺게 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급격하게 가까워진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의 경우 너무 급격하게 다가오는 사람은 일단 경계하게 된다. 왠지 절박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멀어지고 싶어진다. 


아이 엄마들과의 세계도 사회와 비슷해서, 좀 특이하신 분도 있고 나와 결이 안맞는다고 느껴지는 분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육아 방식은 저마다 달라도, 내 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똑같다. 그 마음만큼은 공통분모처럼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더 누그러지고 날을 세우지 않게 된다. 


매일 매일 여러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상황도 맞닥뜨리게 된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거나 다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러면 삼삼오오 서 있던 엄마들이 출동하여 아이들을 중재하고 다친 아이를 어루고 달래는 상황이 펼쳐진다.


여기서 제일 주의해야 할 점은 다른 아이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내 아이를 너무 잡으면서 혼낸다거나, 반대로 다른 아이가 다쳤거나 우는 상황에서 내 아이의 편만 드는 실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똑같이 부딪쳤는데 한쪽 아이만 넘어져서 다쳤을 경우, 대부분의 엄마들은 서로 미안해하며 좋게 마무리하려고 노력한다. 본의 아니게 가해자(?)처럼 되어버린 아이 엄마 쪽에서도 미안하다고 괜찮냐고 연신 물어보고, 다친 아이 엄마 쪽에서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하며 상황을 수습한다. 


이렇게 아름답게 수습하고 적당히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 넘어가면 좋은데, 나는 한발 더 나아가 아이를 지나치게 꾸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타인에게 한톨의 민폐도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과 나의 알량한 체면 때문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내 아이에게 "좀 조심했어야지, 엄마가 그렇게 뛰지 말랬지!" 하고 혼을 내버린 것이다. 


내 마음 한 켠에는 상대방 엄마에게 미안해서, 혹은 다른 엄마들에게 비난(?)받기 싫어서 먼저 선수치듯 혼내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도대체 내 아이 마음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남들 시선이 무서워 순간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는 억울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친한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나를 말렸다. 자신이 아이 표정을 봤는데, 상대방 아이가 넘어졌을 때부터 이미 표정이 얼어있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상대방 아이 엄마의 눈치부터 살필 게 아니라, 내 아이의 놀란 마음부터 진정시켜주고 안아줬어야 했다. 


나는 이미 나 개인이 아니었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나는 이 아이의 또 다른 얼굴이고, 보호자이고, 모든 것이었다. 아이에게 우주같은 존재인 엄마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억울하고 외로웠을까. 나는 왜 아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지 않았던 걸까. 


그 이후 나는 뼛속깊이 내재된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태도를 버리려고 노력했다.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 아이의 마음을 제일 먼저 살피고 달래주었다. 설사 아이의 잘못인 상황에서도 엄마는 변함없이 너의 편이라고, 몰라서 그랬던 건 엄마도 알지만 이제 배웠으니까 멋있게 사과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반대로 아이가 다쳤을 땐 마음 속은 부들부들 떨리고 나도 같이 울고 싶지만, 아이가 놀랄까봐 애써 담담한 척도 많이 했다.


엄마가 자신의 마음을 먼저 보듬어주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활짝 웃으며 좋아하던 아이 얼굴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자신을 알아주니 마음 속 억울함이 없어지고, 억울함이 없어지니 편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사과도 할 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아는 마음의 힘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상황을 빠르게 수습하려고 어른이 나서서 억지로 화해시키는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잘 챙김받은' 아이가 진심으로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고 헤아려 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부모가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른들도 그렇다. 내가 체력적으로 힘들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에는 작은 일에도 뾰족해지고 인색해진다.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보거나 이해해줄 마음의 곳간이 부족해진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충분히 이해를 받았을 때, 내 마음의 억울함과 분노가 조건없는 사랑과 이해심으로 보듬어지고 나면, 마음 한 켠에는 금새 미안함과 후회가 싹튼다. 비로소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육아란 것은, 거꾸로 아이가 나를 키우는 과정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를 통해 나도 몰랐던 나의 부끄러운 민낯, 아이같이 자라지 못한 미숙함을 본다. 아이가 성장하며, 나도 함께 성장한다. 아이에게 원없이 조건없는 사랑을 쏟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아이로부터 받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날 희생시켜 아이가 크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나도 성장한다. 아이를 통해 겸손을 배우고, 나만 생각하던 이기적이고 좁았던 내 세상이 아이를 통해 넓어진다. 


어느새 의젓해진 아이를 보면 가끔 눈물이 날만큼 가슴이 아려온다. 벌써부터 너무 의젓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성숙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타인의 입장만 배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 자신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면 좋겠는데. 조금만 더 천천히 자라면 좋겠는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쑥 불쑥 고개를 드는 엄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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