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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 Nov 14. 2020

감사한 사람들에게 - Part 1

새로운 곳을 간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설렘 이면에는 그동안 머물렀던 곳,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의 이별을 전제로 하기에 떠남의 결정이 쉽지는 않다. 9년 전 가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왔고, 새로운 장소와 더불어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운이 좋게 학교 졸업 후, 학교 근방에서 직장을 잡으면서, 몇 년간 큰 이별은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만남들이 있었다. 아내와의 만남, 아이의 탄생, 그리고 아이를 통해서 친해진 가족들, 성당 사람들...


이번에 팬더믹 노마드 프로젝트를 결심하고 나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타지에서 정말 가족처럼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의 이별이 아니었을까. 프로젝트를 누구보다 응원해준 사람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도움을 많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급하게 떠난 거 같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감사 인사를 여기를 통해 전해 본다.



소운이네

재선이형을 처음 본 건, 아마 2004년 형이 제대 후 복학했을 때 동아리 모임에서였다. 그 뒤 형의 박사 유학 송별회로 신림동 고깃집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7년 뒤, 형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 후 연구 과정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계셨고,  버클리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석사 과정의 유일한 낙이였던, 테니스를 통해 형이랑 다시 만나게 되었고, 2013년 삼성컵 버클리-스탠퍼드 테니스 대회에 복식 조로 처음 호흡을 맞췄고, 8강이란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기도 했다.


서로 각자의 가정이 생기고 집이 멀어지면서 교류가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형 집을 가면 언제나 푸짐하고 맛있는 밥상으로 우릴 맞아주셨다. 그러다 형수님이 직장을 우리 집 근처로 옮기시면서, 5분 거리로 이사를 오셨다. 이사 후, 더 자주 왕래를 했고 지난 3월 코로나 이후 아이를 키우는 워킹 부모로서 전우애를 느끼며 더 가까워졌었다. 특히 삼촌을 (아빠보다) 아니 아인이보다 환영해주는 소운이와 초하는 둘째에 대한 환상을 내게 심어주기도 했다.


집을 정리하고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어딜 가냐며, 우리 두고 어떻게 갈 수 있냐"며 타박하던 형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이지, 가는 날까지 저녁이며 공항 라이드까지 해주셨고 그리고 떠나는 날까지도 미쳐 양도 안된 테슬라 보관과 앞으로 오는 우편물까지 받아주겠다 하셨다. 재선이형과 형수님이 안 계셨다면 과연 이렇게 수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까... 재선이형, 형수님, 그리고 장난꾸러기 아이들. 너무 좋은 기억들로 채워주셔서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지호네

상헌이형은 섬세하고 정이 많다. 그래서인지 형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2015년 타호 여행을 통해 가까워졌는데, 지호의 대부(god father)가 됨으로써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 갑작스레 연락을 해도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고 맛있는 도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샌프란 시스코에 일부러 가면 마음 편히 연락하곤 했다. (근에, 형수님이 15년 전 대학 교양 수업의 조교였고 내게 A+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를...)


코로 인해 회사 출퇴근을 안 하면서, 운동량이 현저히 떨어졌을 때, 아버지의 날 라운딩을 핑계로 골프채를 다시 잡기 시작했다. 30분 남짓이지만 전날 밤 유튜브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해 집 앞 연습장을 정기적으로 찾았다. 비슷한 시기에 상헌이 형도 골프를 다시 시작하며, 한 달의 한 번 이상은 함께 잔디 위를 걸었던 것 같다. (골프라 쓰고 육아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함이라 읽는다.)


을 다 정리하고 한국에 잠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한 지 이틀 지났을까, 형네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덕분에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매일 안부를 묻고, 서로 먹은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언제나 나눠주시는 형과 형수님, 그리고 개구쟁이 지호. 항상 받기만 해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우리 지호를 위해 기도 많이 할게요!



원영이

씩씩한 형 같은 동생. 하고 다니는 짓은 철없는 동생인데, 마음 씀씀이는 나보다 배는 낫다. 성당에서 이상하리만큼 싹싹하던 친구여서 손쉽게 사귈 수 있었는데, 사실 아인이가 태어나고 나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처음엔 한 달에 한번, 이주에 한 번씩 오더니, 매주 아인이를 보러 왔다. 밥을 얻어먹고 갔다 그래서일까 아인이에게도 최애 삼촌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원영 삼촌을 이야기한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올 때마다 한 뼘씩 성장한 티가 난다. (물론 옆으로 성장한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도그패치 공원에서 성당 미사 후에 사람들과 모여있을 때 푸드트럭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응원 차 신생아 아인이를 처음 밖으로 데려나간 것도 원영이 푸드트럭이었을 터. 그런 원영이가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치킨 집 사장님이 되었다. (지금 보면, 돈 주고 사 먹은 거보다 얻어먹은 게 많았네..)


코로나 이후, 주변 사람들과 만남을 자제하고 있었고 만나자는 주변 사람의 연락에 매번 미안하게 거절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영이는 코로나 음성 결과를 찍은 사진을 보내줬다. 녀석, 철두철미하기는... 코스트코 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걸 물어봐주기도 하고, 맛있는 치킨도 배달해주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미안해서 부탁하지 못했는데 선뜻 공항 라이드도 해주겠다고 해서 너무 고마웠다. 마음이 따뜻한 슈퍼 인싸 원영이 누가 데려갈 사람 없나요?




마지막으로 곁에 있는 아내에게

이 글을 올리는 날은 아내의 생일일 뻔했다. 일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제주도라는 타지에서의 생일. 사실 아내는 결혼하고 6년 동안 60년 넘은 오래된 집에서 살면서 크게 불평 안 하고 아기자기하게 신혼집을 가꿔나갔다. 어찌 보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내 계획에 선뜻 동의해주고 함께 준비해줘서 사실 제일 감사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안정된 가정을 꿈꾸는 아내에게 팬더믹 노마드는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희생으로 리 가족 모두 자가격리 2주를 무사히 마쳤고, 제주도의 보름 살기도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 와중에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인스타(!)도 열심인 아내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함께라면 잘 풀어갈 수 있을 거라 의심치 않는다. 이 시간들이 아내와 나 그리고 아이에게 좋은 기억들로 남을 수 있게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해야겠다. 함께 해줘서 너무 고맙고 많이 사랑합니다.




사람들과의 이별은 물건들과의 이별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인연이라는 끈을 믿기에,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가까워질 때가 있겠거니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과는 조금 더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돌이켜 보면, 새로운 곳에서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재선이형, 상헌이형, 원영이 외에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집사님, 자매님, 형, 누나, 그리고 친구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아인이가 이렇게 밝고 씩씩하게 클 수 있었을까 싶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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