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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Oct 05. 2024

아버지의 엽서

 복부 대동맥류 수술이 잘 되어 회복하시고 퇴원 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잇단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평소에 식사도 잘 하셨고 전반적으로 크게 불편한 걸 못 느끼시고 생활하셨다. 정신도 총명하셔서 대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셔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시고 간호하는 자식들이나 의사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통증도 잘 견디어 내셨다. 지난해  말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원하셔서 새해 들어 우리 나이로 여든이 되시자마자 고작 20일간의 병원 생활을 하시고 삶을 마감하셨다. 

 이 수술을 이겨내시고 적어도 5년, 길면 10년 이상 아버지는 우리 옆에 계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족들은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건강 검진 결과 앞에서 아버지도 수술을 마다하시지 못하셨다. 길게 잡아도 한 달 후면 집으로 돌아가실 것으로 믿고 계셨다. 우리들이 받은 충격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넋이 빠진 우리에게 아버지의 유품들은 슬픔의 파도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옷에서 나는 아버지 냄새, 쓰시던 비누에 붙어 있는 몇 가닥 머리카락은 우리를 오열케 했다. 피우시던 담배꽁초를 주워서 입에 대보고 아버지의 숨결을 느껴보려 하기도 했다. 

 아주 낡은 앨범도 있었다. 아버지의 청년 시절, 첫 직장 시절 사진들. 우리가 언젠가 보았던 낯익은 사진들이었다. 한참 사진 속의 아버지 모습에 빠져 있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있던 것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오래된 엽서 몇 장이었다. 1975경, 신문기자이셨던 아버지가 해외 취재를 가셔서 가족에게 보내신 것들이었다. 단정하고 부드러운 필체. 글씨를 쓰실 때 오른쪽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펴다시피 하고 천천히 움직이시는 아버지 손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동생들은 이 엽서들을 처음 본다고 했고 나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엽서의 그림들은 모두 외국 도시의 사진이었다. 인터넷은커녕 국제전화도 엄두내지 못하던 시절 멀리 두고 온 가족들에게 사진으로나마 당신이 머문 도시의 모습을 전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여보, 건강은 어떠시오. 애들하고 얼마나 고생스럽소. 애들일랑 아프지는 않은지 궁금하오.”     

엽서들 구석구석에서 가족들 건강을 챙기시고 함께 하지 못함에 미안하심을 드러내셨다. 

아내에게 건네는 문어체 말투에 아버지의 성품이 드러났다. 당시 엄마는 딸 둘 아래로 아들을 출산한 지 1년이 채 안됐었다. 몸이 안 좋은 아내에게 청심환을 아끼지 말고 사용하라는 당부도 하셨다.

 나를 수신인으로 한  도쿄 발 엽서에는 그곳 물가가 한국의 3배에서 5배나 돼서 

 “돈이 돈이 아니다” 

하시며 실감을 돕기 위해서였는지 구석에 지출 내역 메모를 덧붙이셨다.      

 ① 기본 이발료 = 2000원 ② Y샤쓰 = 400원 ③ 코피 한잔 = 260원 ④ 택시 기본료 =      400원

 ⑤ 불고기 = 2000원 ⑥ 호텔비 8000원 … …      

 그래도 마지막에는  

 ‘네 선물은 꼭 사가마’ 

 여섯 살 큰딸 챙기기를 잊지 않으셨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라인강 로렐라이 부근에서 엽서를 쓰셨다. 물을 사먹는 게 아까워서 경치 좋은 곳에서 차라리 포도주 한 잔을 사 드셨다고 했다. 당시 한국 사람에게는 물을 돈 주고 사먹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파리에서는 독일에서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몸살감기가 많이 좋아졌다는 안부와 코트를 하나 사려니 쓸 만한 것은 20만원이나 해서 그림의 떡이며 역시 한국이 뭐든 싸고 좋은 나라라는 애국심 표현도 잊지 않으셨다. 싱가폴에서는 그들이 잘 사는 것을 보니 은근이 배도 아프고 부럽지만 우리도 열심히 살아 5~6년 후면 함께 같이 여행 오자고 쓰셨다. 이 대목은 사실 당신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자 격려 같이 읽혔다.      

“꼴지야, 동생은 이제 앉을 수 있느냐”     

 아버지가 둘째딸에게  이렇게 말한 부분에서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부디 딸로는 꼴찌가 되고 아래로 남동생을 보라는 의미로 집안 어른들이 둘째를 그렇게 불렀는데 남동생이 태어나자 꼴지는 다행히 제 본명을 찾을 수 있었고, 우리는 오랜 세월 ‘꼴지’를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엽서들을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누며 당신의 시대와 청춘을 함께 추억해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연세 들어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셨던 아버지의 내면 저 깊은 곳에 다가가 따뜻하게 채워드리지 못한 후회로 나는 아프고 또 아프다.


 우리는 또 울고 있었지만 젊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어 흘리는 반가움 때문이었다. 

 떠나신 순간부터 그리움은 시작된다. 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지금부터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마음껏 그리워하려 한다. 영웅은 불멸이라는데 우리들 안에 영웅으로 사시게 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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