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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Mar 02. 2024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삶

진은영의  <무신론자>

무신론자


                                                                  진은영

   



   스위치를 올려주소서

   깜깜한 방 속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신,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거리로 나가 무신론자,

   그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는 

   속이 빈 커다란 드럼통을 요란하게 굴렸을까


    유신론자는 겸손해진다

    신이 푸른색 양피지에 적어 

    돌돌 만 수수께끼 두루마리를

    끝도 없이 자기 앞에 늘어놓을 때 


    그러나 무신론자, 그에게는 다만 즐거운 일

    여름이 되면 장미 정원에서 

    수만 개의 꽃송이가 저절로 피어나듯

    수수께끼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으면 되는 일이다

    피지 않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그런대로 좋은 법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

    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돛단배 사과나무와 기린 화산 무지개

   수염고래가 뿜어내는 투명한 물줄기에서 

   잠자리  날개의 은빛 무늬에서 


   그런 관점을 비웃을 틈은 없다

   사물의 바닷가에 기기묘묘하게 그려진 모래 그림을 

   관찰하느라 

   무신론자, 그는 항상 바쁘니까 

   순간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잠깐 동안에 

   한 번도 똑같지 않은 그 기하학적 연속무늬를


   그는 어리석다, 유신론자가 보기엔

   이미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두고

   차들이 과속으로 달리는 도로 속으로 들어가니까

   노란색 페인트 통을 들고 

   자신이 건너갈 건널목을 멋대로 그리면서 


     

    유신론자처럼 무신론자도 죽는다

    두 사람은 수줍게 머뭇거리며 나아간다

    하느님의 두 손바닥으로 

    밤하늘 별로 만들어진 저울 위로 

    영혼의 무게는 똑같다

    사이좋게 먹으려고 두 쪽으로 쪼개놓은 사과처럼




    진은영 시집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중에서




 이 시에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나란히 등장한다. 그런데 제목은 '무신론자'이다. 


 유신론자가 기도하는 시간에 무신론자는 밤거리로 나가 빈 커다란 드럼통을 요란하게 굴렸다. 유신론자가 신의 말씀 앞에 무릎 꿇고 겸손하게 있을 때 무신론자는 신이 만들어 놓은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들 - 수만 개의 장미 꽃송이가 피어나 뿜어내는 향기를 즐기기만 한다. 그런 자연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화가 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좋아한다. 유신론자는 세상의 동물, 식물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신의 흔적을 느낀다. 아마 신의 창조의 은혜에 끊임없이 감사했을 것이다.  

 

 무신론자는 자연이 순간순간 다르게 만들어 내는 아름답고 기묘한 현상을 관찰하느라 바쁘다. 유신론자는 신이 기다리는 구름다리 너머 그가 가게 될 마지막 세상이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굳이 무모한 일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엔 무신론자가 어리석을 뿐이다. 무신론자는 위험한 도로 같은 낯선 세상에  무모하게 들어서며, 철없는 꿈도 꾸고- 노란색 페인트로 그리는 그림- 제 멋대로 갈 길을 스스로 정하고 도전한다 - 건널목을 멋대로 그리면서. 신을 믿건 믿지 않건 둘은 죽어서 하느님의 두 손바닥으로 머뭇거리며 나아간다. 두 영혼의 무게를 재는 도구는 밤하늘 별로 만들어진 저울. 둘은 모두 신 앞에서 수줍다. 


 진은영 시인이 무신론자인지 유신론자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하느님의 손바닥을 등장시키며 시를 맺었다. 그렇다면 시인은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는 믿음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거나 관심도 없는 무신론자의 삶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무신론자는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느라 바쁘다. 발랄하고 무모하기까지 하다. 자기가 해보고 싶은 대로 해보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며 살아간다. 신이 준 운명의 과업 앞에 무릎 꿇고 한 방향으로 경건히 나아가는 유신론자의 삶에 눈 돌릴 틈이 없다. 


 진은영 시인은 우리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무신론자처럼 산다고 하는 것 같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도전하고, 호기심을 따라 이 세상을 구석구석 누린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져서 신 앞으로 나아간다.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자기가 준 운명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유신론자나 항상 바쁘게 신의 선물인 준 인간의 자유 의지로써 이 세상을 경험하고 온 무신론자나 모두 신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은 똑같이 소중하다. 

 

 유신론자인 나는 신을 의식한다. 그분에게 감사하며, 무신론자들이 그러하듯이 열심히, 충만하게 생을 살다 간다면 창조주는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아버지처럼 그만하면 잘했다고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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