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콕 생활이 익숙한 요즘이지만 신경 쓰이는 게 하루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남편 출근 시간에 맞춰 아침을 준비하고는 다시 늦잠을 자는 딸아이 밥을 챙겨준다. 혼자 있으면 하루 한 끼 라면으로 때우려는 딸아이의 성향을 알기에 되도록 식사를 챙기겨준다. 그러다 보니 하루 네다섯 번 밥상을 차린다. 남편과 딸아이 식성도 다르다. 아침과 저녁식사에는 국 찌개를 준비하고, 딸아이 밥상은 김치볶음밥 같은 간편식이나 고기반찬을 준비하는 편이다. 여태 아침 식사를 걸렀던 나도 퇴사를 하고는 밥을 더 잘 챙겨 먹는다. 이래저래 밥하고 설거지 하는 밥설밥설을 하루라는 게임의 퀘스트다.
매일 먹는 밥과 반찬인데 물가가 장난아니다. 계란 한 판이 8천 원이나 하니 마트에 가도 식재료가 마땅치 않다. 겨울철 채소류는 신선도에 비해 가격도 높아 들었다 놨다 한다.
막상 식탁 위에 올리면 젓가락질 몇 번에 끝날 반찬 한 가지도 사실은 이렇게 손이 간다.
재료를 사다 다듬고, 씻고 자르고, 지지고 볶고......
오늘은 마트를 한 바퀴 돌다 등갈비를 한팩 사다 김치찜 한 솥을 끓였다. 된장을 살짝 풀어 양파, 파를 넣고 김치와 데친 등갈비를 넣고 푹 끓이니 고기가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다.
부드럽다 못해 흐물흐물한 김치를 찢어 밥 한 술 뜨며 한국인의 입맛은 이런 건가 싶다.
푹 끓인 갈비탕, 설렁탕, 육개장 같은 요리가 유난히 많다.
그러다 생각이 '인생도 김치찜 같은 거지.'로 흘러간다.
뭔가 설익어 알듯 말 듯할 때는 좌충우돌 자갈밭 같다가, 걷다 보면 겸손을 배우고 속도를 줄이게 된다. 고기에 스며든 양념처럼 살짝 세월의 때도 묻어 손과 얼굴의 주름이 빛나 보인다.
너무 날것이면 질기지 않은가? 기름기 돌도록 푹 익어 한번에 뜯기는 갈빗살처럼 유연하고 나긋나긋해지면 중년의 삶이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 김치찜의 짭조름한 맛처럼 간이 밴 추억이 있다는 것도 썩 괜찮은 것 같다. 싱거운 것보다는 단짠단짠이 새록새록 기억에 남지 않은가? 아이들과의 달콤한 추억부터 돈 때문에 겪은 짠내 나는 생활이 김치찜과 비슷하다.
거기다 등갈비 김치찜을 먹는 식사시간은 규율도 서열도 필요 없는 시간 아닌가? 길게 찢은 김치에 밥을 올려 한 스푼 뜨고, 등갈비 살을 뜯어 맛본다. 남은 밥은 국물에 말아 슥슥 비벼 먹으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평등한 시간이다.
20년, 30년 뒤 냄비 속 김치찜처럼 푹 익어 부드럽게 술술 넘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김치찜 국물이 밥알에 스며들어 감싸 안듯 포용하는 어른이었으면 한다. 등갈비처럼 야들야들 유연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김치찜의 가성비처럼 내 노후도 내실있고실속있길 바란다.
잠깐 중요한 걸 놓쳤다.
김치찜은 역시 김치가 관건이다. 김치 맛이 요리 맛을 좌우한다. 맛있는 김치는 어느 것을 만나도 맛있는 요리가 된다. 설사 요린이인 딸아이가 해도 맛있는 김치볶음밥이 될 테다.
김치찜의 메인 재료가 김치이듯 인생의 주인공인 내가 괜찮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깜박했다. 삶이 김치찜이라면 나는 숙성한 김치여야 한다. 남의 다리 긁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본질을 놓치지 말자. 중심을 지키며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맛을 살린다는 생각을 하며 저녁 설거지를 마쳤다.
내일도 등갈비 김치찜으로 한 끼 식사를 하며 오늘과 또 다른 맛에 감탄할지 모른다.
앞으로 등갈비 김치찜을 해 먹을 때마다 나는 김치처럼 숙성했는지, 김치찜처럼 부드럽게 익었는지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