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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Dec 20. 2023

철천지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과 철천지원수 사이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제자들은 그들 나름 최선을 다해 주님을 보필해 왔다. 그분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드리기 위해 음식을 준비해 왔고 과로로 기진맥진한 그분을 쉬게 해 드리고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제자들의 생각대로라면 예수님은 자신들이 준비해온 음식과 물을 드시며 쉬셔야 했다. 그런데 그분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모호한 말씀만 하신다. 

메시아를 발견한 사마리아 여인이 생명수를 마시는 것에서 그분의 주림과 갈증이 채워졌다는 것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의 갈급함이 채워지는 일이 가족 아닌 다음에야 가능하기나 할까? 더구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본숭만숭하는 사이였고 서로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들과 달랐다. 그 보잘것없는 여인을 기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생명수를 건네주신다. 게다가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 여인만 갈증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인내와 친절이 결국 막힌 담을 헐어냈다.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대신 그들과 자유롭게 섞이셨던 분, 몇 백 년을 서로 원수처럼 지내오던 그들의 내력에 이제 새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관습과 편견을 털어버리기엔 세월의 그림자가 너무 길었다. 이마저도 훗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음을 그들은 알 턱이 없었다.

철천지원수를 사랑하라니, 웬만해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자들의 증오심은 순전히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적개심은 조국을 위한 충성이라는 명분하에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경하는 선생님 때문에 이제는 내색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은 불만으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위선으로 가장했다. 경멸과 증오심을 갖는 대신 긍휼과 동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에 느렸던 제자들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위해 명분을 앞세우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기준에서 공의를 핑계 삼아 기대고 싶은 명분을 앞세운다. 그런 명분은 흔히 조직과 인맥의 공통점으로 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분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셨다. 얼마나 다행인가? 안식일에 제자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기 위해 밀을 취하신 것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도 유대인들의 원수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의 기회를 주신 것도 명분을 앞세우셨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훗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이날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절히 대하셨던 예수님의 덕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고 그때서야 제자들은 사무치게 감사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 불편하고 원망스러운 일들도 언젠가 상황이 전도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이라 했다. 마음을 주님께 고정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후회의 횟수는 줄어들 것이다. 


복음의 초청을 선택된 소수에게, 곧 우리의 생각에 그들이 그 초청을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영예가 되리라고 여겨지는 자들에게만 국한시켜 제시해서는 안 된다. 이 기별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진리를 받으려고 마음 문을 연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가르치려고 대기하고 계신다 (DA, 194). 


이 말은 누군가가 받게 되는 혜택을 내 것을 빼앗기는 것처럼 안타까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특별한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나님의 빛이 임하시니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삶이 버겁고 힘겨운 이들이나 혹, 원수라 할지라도 품어 주라는 말씀이 아닐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여 경험이 많아지고 자리가 굳어질수록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경험으로 익혀 온 것들과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든 권위는 말씀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오랜 기간 성령의 바람에 젖어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경험에 젖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말씀을 이해할 때도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받고 싶은 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씀을 펴서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받아 나에게 적용하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말이다.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았던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선한 행동과 공로에 취하여 예수님의 교훈과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일 여지도 없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업적만을 치하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예수께서는 편견을 깨트리셨고 여론에 타협하지 않으셨고 비난에 휘둘리지 않으셨으며 어떤 정치적 문제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셨다. 또한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겉치레에 불과했던 형식 대신 마음의 중심을 보아주신 분이셨다. 

예수님은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인생이어도 생수를 갈급하는 그 심령만을 귀히 여겨주신 그런 분이셨으니 과연 내가 평생을 걸고 모셔야 할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https://www.sijosa.com/?bbseGoods=310

*이 글은 위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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