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계산
우리가 전지적 시점으로 우리와 유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유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면 자신과 유다와의 다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다와 나의 다름은 시선의 고정, 눈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께 눈을 돌리고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결코 눈을 맞출 수 없다. 예수님과 눈을 맞춘다는 것은 예수님의 설득을 받아들일 준비가 이미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선하신 눈빛을 경험한 우리는 고집부려 내 갈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교만하여 거친 인생길로 내 발이 향할 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을 느껴야 한다. 그러고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눈물 주르륵 흘리며 예수님께 나를 맡기는 거다. 꼭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을지라도, 내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 아무리 멋질지라도, 내 인생에 예수님이 없다면 나는 유다와 같은 사람일 테니까.
유다는 가야바의 법정에서 끝내 자신이 기대한 바와 다른 길, 고난의 길을 선택하시고도 유다를 측은하게 바라보신 그분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대제사장과 폭도들 앞에서 드라마틱하게 신의 아들임을 드러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원수들을 제압할 비장의 무기가 발현되기를 끝까지 염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더 지켜본다 해도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시지 않을 분이셨다. 예수께서 폭도들이 퍼붓는 모든 욕설을 묵묵히 참으시는 것을 유다는 허탈하게 바라본다.
공포가 밀려왔다. 양심의 가책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가야바에게 이 무죄한 사람을 살려 달라고 쉰 목소리로 애원한다. 이미 이성을 잃은 가야바도 이 엄청난 범죄를 속히 해치우고 싶었기에 유다의 간청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드디어 유다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스스로 목숨을 구하시라고 간청까지 하고 있다.
후회했다. 두려웠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돌이키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 그 순간 유다는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던 삶의 슬픈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유다였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사명을 오판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그랬다고 할지라도 후회가 아닌 회개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목청껏 외쳤던 회개하라는 그 말, 그가 그것을 깨달았더라면 어땠을까?
회개는 죄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죄를 짓고 벌에 대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죄책감에 눌려 울부짖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이다. 죄의 결과로 인한 벌이 두려워 하는 그런 후회가 아니라, 예수님 사랑의 무게에 눌려 다시는 그것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예수님은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고 그의 자복 역시 그가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부인한 일에 대해 마음을 찢는 깊은 슬픔을 느낀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죄에 대한 공포심과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에 가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임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죄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DA, 722).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정죄와 심판이 두려웠을 뿐이다. 그렇게나 오래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며 보고 경험하고 가끔 깨닫기도 했었지만 유다는 결국 눈앞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인생이 끝났다. 유다의 비참한 최후가 나의 것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따라다니느라 고생만 하고, 봉사하느라 헛된 수고만 하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세상 불쌍한 유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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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