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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Feb 21. 2024

베드로의 새벽

당신은 이미 성공하였는가? 아니면 성공을 위하여 무한 질주중인가? 자신의 형편이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는 환경이던가? 어딘가에 혹은 무엇인가에 발목이 잡혀 있지는 않은가? 그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혹 돈? 아니면 가족? 아니면 학벌? 또는 능력?

이런 생각에 이르면 성공은 나와 점점 멀어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된다. 그동안 아무리 잘했던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 없어지고 꿈이라고 얘기하기도 쑥스러운 보잘것없던 희망은 어느새 절망이 되어 있다. 시험과 고난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마주할 때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베드로가 그랬다. 자신의 동료이자 의지의 대상이었던 침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죽을 운명에 처해 있고, 거듭되는 전도의 실패로 보아 자신과 동료들의 운명도 암담하기만 했다. 인생의 희망을 걸었던 구주 예수님은 제사장과 랍비의 표적이 되어 집중 공격을 받으시는 중이다. 이때 베드로의 인생은 벗어나기 힘든 절망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렇게도 야심 찼던 성공은 점점 멀어진다. 그래서 그는 주님 곁을 잠시 떠나기로 한다. 세상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헛된 기대를 안고도 그런 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다.

우리가 만약 인생의 어느 중요한 기로에서 헛된 현실을 알아버렸다면 그때 우리도 주님을 떠날 것인가? 예수께서 그토록 알아듣기 쉽게 진리를 설파하셨건만 제자들은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여 이 땅의 영광만을 위하여 인생을 바쳤었다. 물론 가끔 깨달음도 있었고 뉘우침과 회개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쭉정이는 알곡과 분리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허영심이 많고 독선적이어서 견책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겸비의 생애를 감수하기에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였으므로 대부분이 예수님에게서 떠나갔다 (DA, 392).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그렇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가고 있었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베드로는 여러 번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었다. 그분의 신격을 가장 측근에서 지켜보았었다. 육신으로만 동행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영혼의 닻으로 여겼다. 보리떡의 이적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말씀과 생명 유지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셨으나 보리떡만 받아먹고 생명의 떡인 말씀으로 매일 영혼을 먹여야 한다는 것은 아직 깨닫기 어려웠던 걸까?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제대로 알긴 했던 걸까?

 그런 그가 다시 갈등하며 자신의 일터였던 바다로 되돌아갔다. 고기잡이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 한 마리도 못 잡고 빈 그물만 바라본다. 그렇게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낙심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또 찾아오셨다. 그리고 절망의 그 순간에 베드로의 배를 빌리셨다. 이제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를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려 하신다. 그물을 던지라신다. 거기는 밤새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던 곳이다. 예수님이 모르실 리 없으실 텐데…베드로는 밤새 그곳에 그물을 던졌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밤새 허탕을 쳤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시 던져 볼게요 한다.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고기가 잡혔다. 그것도 그물이 찢어지도록 말이다. 혼자서는 끌어 올릴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압도되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을 보여 주셔서 그분께 엎드려 감격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과 처지를 헤아려 주시고 낙심의 최하점을 찍을 때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신 세심한 예수님의 배려와 하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낙담과 절망 중에 있는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분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분의 제자로 활동했지만 진정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이 순간에 일어났다.


이사야에게 하늘의 기별이 위탁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본 후에 있은 일이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업에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아를 버리고 하늘의 능력에 의지한 후에 있은 일이다 (DA, 248).


그 순간 비로소 불평하던 베드로는 예수께로 이끌렸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났던

호수에서의 그 슬픈 밤에 그들은

불신에 억눌려 있었고

결과 없는 수고로 피곤하여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임재가 그들의 신앙에

불을 지펴 주었고 기쁨과 성공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의 사업이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의심하며 불평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에 계시고

그분의 지도 아래서 일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능력의 증거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영혼을 낙담하게 하는 것은 사탄의 일이요

신앙과 소망으로 고무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이다 (DA, 249).


그 새벽, 예수님께 압도당한 베드로는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보잘것없는 자기 모습을 마주하는 그 순간, 생명의 시여자께서 우리를 향하여 조용히 보내시는 사랑과 관심에 압도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것은 자신이 한없이 작아졌을 때 깨닫게 되는 특별한 축복이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일서 1:2)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6).


하나님의 말씀은 교만한 우리를 위한 매일의 만나이다. 우리 삶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매일 먹는 떡이라는 매개를 빌어 말씀하셨을지? 그런데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삶의 지경이 넓어질수록 말씀 없이도 잘 살아지니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 몰입할수록 그분은 설 자리를 잃으신다.

그리고 말씀에 몰입되지 않는 순간 세상이 내게로 들어온다. 그러면 스스로 잘 살아가는 줄로 믿고 살아간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동안의 성과와 업적을 대접받고 싶어 한다. 대접 받는 것과 칭찬에 취한 사람이 영혼의 닻을 잃고 표류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는 뉘게로 갈 것인가?” 곰곰 생각해 본다. 어떤 상황이 와도 변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지, 우직하게 그분의 곁을 지켜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러나 말씀으로 만나 주시는 그분을 뵐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서 다행이다. 날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시험 속에서 먼저 그 시험을 이겨내신 그분의 발자국 위로 내 걸음을 조심스럽게 포개본다. 오늘도 뒤돌아보시면서 선명한 발자국을 내주시고 잘 따라오는지 살피시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한 발짝 더 예수께로 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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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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