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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Feb 22. 2024

가룟 유다의 플랜 B

유다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마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접하는 순간부터 유다의 배신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은 유다를 나쁜 사람이라고만 단정 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왔을 것이다. 거기에는 결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될 리 없다는 단호한 우리의 속마음도 포함된다. 우리도 충분히 유다일 수 있는데 말이다.

유다처럼 교만하고 우러름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나서서 살림을 책임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존경받고 싶고, 어느 줄에 서야 내 인생이 꽃길을 걷게 될지를 계산한다면 말이다. 나에게 이로울 사람을 가늠하여 그렇게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유다를 닮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자신은 그렇게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 일을 감당하기에 자격이 넘치는 사람,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람이라는, 밑바닥에 감춰둔 교만의 속내가 올라오는 순간이다. 평소에 이 교만은 겸손의 뒤에 가려져 잠자코 있다가 기회가 왔을 때 순간 우리를 제압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일 잘하는 사람


대부분의 제자들이 어부나 세리였던 것과는 달리 유다는 지식과 명예를 갖춘 자였다. 그저 우러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 맞다. 유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직분을 순종으로 감당했더라면 세상 역사는 아마도 달라졌겠지? 그러나 유다는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 이전에 죽었으면 좋을 뻔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DA, 716).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제자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만남을 시작하거나 일을 시작할 때는 목표가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희망을 품었다. 그분을 만남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는 희망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과 그분에게서 느끼는 평안이 그들을 희망으로 이끌었다. 유다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희망을 품었지만 제자들과는 다른 희망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인생 제2의 도약을 꿈꾸었다. 그는 더 높은 자리가 탐나서 예수님 곁에 남았던 사람이다. 그분께 잘 보이려 노력했고, 성과가 있는 일에 집중했고, 자신의 학식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예수님 곁에서 눈에 띄게 일을 했다.

이런 유다에게도 순간순간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자부심이 더 강했던 유다에게 내세와 영원은 가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의 왕인 예수님에 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켰고 거기서 더는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니 똑똑한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래 따라다니기만 하고 소득 없는 일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베드로, 그는 침착하지 않았고 급한 성격에 생각 없이 사고만 치는 사람이다. 요한,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들을 주워 담아 전하기에 급급한 사람이었으며, 세리였던 마태는 지나치게 정직하여서 오히려 배포가 작고 계산적인 사람이라 단정지었다. 유다가 보기에 제자들은 다들 답답하고 무능할 뿐이었다.

유다는 제자들 틈에서 늘 잘난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대놓고 드러낸 것은 아니다. 아주 겸손하고 성실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교만을 숨겼다. 교회나 직장에서의 우리들처럼….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종종 우리는 유다일 수 있다. 유다처럼 남들이 하는 일은 하찮게 여기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비중을 두어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미 유다이다. 봉사하고서도 자신의 수고를 계산하려 들고 자신의 몫을 챙기고 있다면 우리는 유다이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명분을 내세워 남도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면 우리는 유다였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으로 망해가는 회사도 일으킬 것 같다면, 교회를 살릴 묘안 같은 건 자신에게서나 나온다고 믿는다면, 이미 교만의 포로이다. 교만은 내가 공을 들이고 세심하게 계산하는 것과 달리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나갈 때 튀어나온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진 향유 옥합을 쏟아붓는 바로 그런 순간에 점잖게 튀어나온다.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행위에 주목하지 않고 향유 값을 먼저 보았다.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텐데, 그 돈이면 교회 건축에 보탤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어떤 곳에 지원금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본인의 그럴듯한 구제사업 계획을 내세웠다. 그 정도의 옥합을 살 돈이라면 자신의 재정 능력을 미루어볼 때, 훨씬 가치 있는 곳에 그 돈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유다는 동료들보다 훨씬 우월한 자기 능력을 인정하고 신임받고자 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에 점점 취해갔다. 예수님 곁, 어리숙한 제자들 틈에서 유다는 고고한 자태로 높임 받으며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더욱 높아져 갔고 더욱 탐욕스러워져 갔다. 이대로라면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셨을 때 이인자 자리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유다는 사탄이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으로 자신을 준비시켜 나갔다.


유다를 참아주신 이유


예수님이 유다를 참아주신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의 품성적 결함을 고칠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하셨다. 봉사를 통하여 이기심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기에 중요한 직분을 그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유다는 봉사를 하면서도 자신의 수고비를 챙겼다. 수고의 대가를 이 땅에서 이미 계산한 유다의 행위는 안타깝게도 봉사가 아니라 노동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유다의 눈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조차도 못마땅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대범해진 까닭은 그의 인생 경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학식과 그간의 명예, 살아온 경험으로 예수님을 알았으며 그의 경험적 계산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 곁에 있으면 더 높은 출세의 길과 부와 명성을 얻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교육 기관에서 충분히 배웠고 그의 노력으로 좋은 직장까지 얻었었다. 정말로 운이 좋게 신앙도 받아들여 예수님의 제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가치 척도는 세상에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그저 그의 몸뚱이뿐이었다. 그는 끝까지 영의 것을 분별하지는 못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종의 행위를 하고자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신 그 순간, 유다는 그의 꿈을 접어야 할 위기를 직감했다. 이러다가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 이대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다는 결론이 선 것이다. 예수님을 좇으며 그가 꿈꾸던 부와 명예와 권력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제자들의 발이나 닦아주는 그분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의 기대는 헛될 뿐이었다. 마음을 접었다. 그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구세주가 아님에 실망하였고 끝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서 일을 냈다. 이제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고 생각한 유다는 플랜 B를 실천했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제자들에 대한 봉사에 유다까지 포함시키셨다. 그러나 마지막 사랑의 호소가 무시되었다. 바로 그때 유다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예수께서 씻기셨던 발이 그분을 팔기 위하여 나아갔다 (DA, 720).


유대인의 왕으로서 세상을 뒤집어 놓으시면 좋으련만 다 왔다고 생각한 그 시점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계셨다. 유다의 마음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이토록 유능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원망이 솟구쳤다. 자신을 믿어주면 사업에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향상될 텐데 예수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생각에 늘 못 미치셨다. 급기야 그분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유다의 플랜 B였다. 예수님을 팔아 그분께 수치와 고통을 드리는 것이 어쩌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유다에게는 높은 학식과 지혜와 경험이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면서 경험을 스승으로 삼아온 습관 때문에 인생 망친 경우이다.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도 경험의 늪에 갇힌 모습이…어쩌면 내 모습이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봉사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본 열한 명의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깊이 감동하였다. 그날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허리를 굽혔던 예수님의 거룩한 행동은 이 열한 명의 제자가 있었기에 위로받았다. 모두가 유다 같지 않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고 그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른 뻔뻔한 유다는 그것을 지켜본다. 자신의 플랜 B가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면서 유다는 배반의 결과를 조금은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예수님을 원수에게 파는 배신을 하면서도 똑똑한 유다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잘못된 길로 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모른다.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거기서 돌아선다. 그 길을 끝까지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이는 많지 않다. 예수께서는 온 마음을 다해 유다가 돌아서기를 애원하고 암시를 주셨지만 유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했다.

유혹은 아무리 훌륭한 인품과 학식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력들은 예수님과의 사이에 방해물이 될 뿐이다.

허리를 굽혀 종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배우지 못한 열한 제자들만이 봉사로 점철된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울 수 있었다. 낮아져야만 진정 높아질 수 있다는 배움은 늘 미완이다.

예수님이 유다를 제자 삼으시고 구원을 위한 중책을 맡기신 것은 유다에게서 버릴 것, 고쳐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다는 그 직분을 과용했다. 늘 예수님의 곁에서 그분을 지켜보았음에도 그는 자신의 구주를 폭도들의 손에 팔아넘길 계획을 했다. 사랑하는 척하면서, 겸손한 척하면서, 열성 있는 척하면서 결국에는 우리 구주를 팔았다. 유다에게 더 이상의 개혁은 없었다. 예수께서 그토록 바라셨건만 유다의 결함은 더 이상 고쳐지지 않았다.

유다는 제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업을 하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았던 어리석음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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