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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Mar 19. 2022

즐거운 편지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한 이유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지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사랑하는 상대방을 기다리면서 그런 것들이 사소한 것이라고 말하면 상대방으로서는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스펙타클한 것들로 일상을 채워나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자극적인 동영상,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에 일상의 진실성을 망각하기 쉽다. 상대가 한없이 괴로워한다면 그와 함께 눈물을 흘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만. 같이 슬퍼해주는 것이 동병상련, 감정이입이라 생각해서 찬사받을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때일 수록 일상을 찾아야 한다. 황 시인처럼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에 헤매이더라도 흥분해서 오버하면 되던 일도 망친다. 1연에서와 같이, 늘 살던 모습 그대로 사소하게 그대를 불러야 한다. 쓸데없이 나대지 말고 해결책을 찾자.


T.S.엘리엇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자기 삶은 커피 스푼으로 잰다고.


이 시에서 결정타는 2연에 나온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언어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기다림의 대상이 안 온다고 성낼 것이 아니라 내 기다리는 자세나 되돌아보자는 얘기다. 안 온다고 성질 내고 전화하고 짜증낼 필요가 없다. 남탓할 필요가 없다. 기다리는 내 자세가 어떤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이 시는 내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무서운 시다. 시험의 결과를 기다릴 때, 어떤 투자를 했다가 목적물을 거둬들여야 할 때, 종합소득세 정산을 해서 납부해야 할 세금을 기다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가 잘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오면 좋기는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기다리는 자세라 할 수 있다. 당장 시험 결과가 잘 나오면 기쁘겠지만 언젠가 그 결과에 자만하게 되면 지금 시험 잘 본 것이 오히려 독이 된다. 세금 정산을 엉터리로 해서 줄여놓으면 납부할 세금이 줄어들겠지만 언젠가 세금 문제를 자만하여 큰 우환거리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과에 집착하지 말라. 내 기다림의 자세가 온전하다면 시험 결과가 나쁘더라도 너무 걱정할 것이 없다. 언젠가 그 선하고 올바른 것이 빛을 발하게 되어 있다. 지금 아니면 나중에 빛이 날 것이고, 이 세대가 실패하면 다음 세대에 성공한다. 코로나를 잘 요리한다며 2020년~2021년에 자만하던 한국이 어떻게 되었는가. 터무니 없는 자세가 문제였다. 단기간의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동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마냥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한참 휴대폰도 안 받고 열받으면 안된다. 바람 맞힌다고 나쁜 년! 이렇게 욕하면 잠시 기분 풀이는 될지 몰라도 우리 자신은 홧병에 갉아먹힌다. 결과적으로 늦게 오니까 짜증난다는 사고 방식은 크나큰 폐해를 가져온다.


역시 황 시인의 충고대로 내 기다리는 자세가 백번 천번 중요하다. 기다리는 시간에 스마트폰에서 엉뚱한 것을 검색하면서 시간을 때워서는 곤란하다. 하얗게 내리는 눈의 아름다움을 가슴 깊이 느껴보고, 호주머니에서 작은 시집을 꺼내서 낭송해보고, 좁은 공간이라도 활용해서 운동을 해본다. 결과를 의식하지 않으면 더욱 풍성하게 활동할 수 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불평 불만하지 말자.


이렇게 기다리는 자세의 훌륭함은 한때의 처세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자세를 바르게 해서 살다보면 꽃, 눈, 낙엽까지 한 해가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인생 50세가 훅 지나간다. 그 인생들이 모이고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급기야 인류를 구성한다.


4계절의 변화라는 것은 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횟수는 많아봐야 100번이다. 그 짧은 기간에 결과만 추구하는 사람은 조급하게 마련이다. 반면 자세를 생각한 사람은 느긋하다. 언젠가 개인으로서의 내 삶은 멈추게 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삶을 겸허하게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후대가 영원히 이어갈 사회라는 것도 포착된다. 내 사랑은 어디쯤에선가 그치겠지만 사랑했던 나의 자세는 남는다.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퍼붓고 다시 봄이 오겠지만 그저 부질 없이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날까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영원한 봄을 꿈꾸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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