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팔룡 Dec 26. 2022

첫걸음이 과도하게 중요해진 사회

원칙과 방향성을 결여하다 보면

내가 신용카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90년대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 내 수중에 돈이 없어도 금융회사의 신용으로 일단 물건을 살 수 있어서 편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사실과 다르다. 외상으로 물건부터 갖다 쓰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기 형편에 맞게 지출을 하더라도, 좀 부족하게 사는 것이 마음 편한 경제 생활의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신용카드가 널리 사용되면서 이러한 미덕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져 간다. 굳이 무슨 이론이라 할 것도 없는 경제 생활의 미덕이 20년 이상 지속적으로 무너지면서 이제 우리는 신용 결제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점포가 부담해야 하는 가맹점 수수료의 비율은 1~2%정도이며 최근 결제의 60%는 현금이 아니라 신용카드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가가치가 발생하는 과정의 맨 끝단, 소비자에게 넘어가는 순간 어마어마한 금액이 금융회사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재화가 용역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여도 한 적 없는 신용카드 회사가 가만히 앉아서 그 수수료를 다 먹는다. 말이 좋아 신용거래지, 합법적으로 피를 빨아먹는 방식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20세기 말에는 세무 당국의 유인이 있었다. 탈세를 막기 위해 판매자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 누군가를 개입시킨 것이다. 소득공제와 같은 혜택이 그것이다. 진짜 세금 탈루를 막는 효과는 어마어마하게 발생했다. 예전에 직장인이 유리지갑이라며 불평을 했는데 이제는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행정 편의주의에 해당된다. 세금을 잘 걷는 것은 세무당국과 국민의 노력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제3의 요소를 수십년간 끌어당겨 편하게 써먹는 것은 옳지 못했다. 세금은 세금이고 신용거래는 신용거래인데도. 이것저것 섞어놓고 행정을 편하게 해보겠다는 심산은 결국 엄청난 기형을 낳았다. (사실 우리들은 기형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과거에 나는 이런 것이 정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원 재분배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의 잘못인 것은 맞지만 그 정치를 만드는 주인들이 바로 국민이라는 생각은 잘 안했었다. 결국 우리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다. 특정 정당의 정치인들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간다. 쓰잘데기 없이 전체 거래액의 1% 정도를 엉뚱한데 지출하여 생산자와 소비자들을 모두 슬프게 만들어왔던 것도 우리 국민들이다. 현금을 선호하는 일본이나 신용카드가 아닌 전자결제 비중이 높은 중국 등 이웃 국가들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는다. 아니 그 어떤 나라도 이렇게 결제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스펙타클한 영상이 없으니 우물안 개구리로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산다.


우리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원리나 원칙 같은 것을 만들지 않고 그저 두둥실 떠다니는 형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어떤 정책의 출발점이 무척 중요하다. 처음에 제대로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골로 갈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많다. 물론 원리, 원칙을 제대로 세운다면 첫걸음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수정하면 된다. 그런데 공통된 지반 위에 세워진 원리 자체가 없으니 수정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 매뉴얼 자체가 없으니 어떻게 수리를 해야 할지 막막한 것이다.


국가가 결단한다면 이제 신용카드 회사의 도움이 없이도 전자결제 세상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도 엄청난 대금을 제로페이 같은 것으로 결제해봤다. 아무 문제 없었다. 신용거래가 대단한 성벽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같지만 조금만 개선하려고 하면 금방 뚫을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미 거대해질대로 거대하진 공룡 기업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공룡들은 그렇게 태어날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행정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그런 공룡들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덤벼드는 시민단체, 국민들의 덩어리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감능력이 있어야 현실이 파악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