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커리어 이야기
나는 어떤 산업에서 일하고 싶은지에 대해 명확했다. 바로 헬스케어 산업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medical device나 med-tech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헬스케어 산업은 워낙 광범위해서 각 분야가 마치 서로 다른 산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헬스케어 산업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나뉜다.
• Provider: 병원 및 의료 기관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
• Payer: 병원이 제공한 의료 서비스나 환자가 받은 의료 서비스에 비용 지불 혹은 상환해주는 기관
• Life Sciences: 제약회사, 의료기기 회사, 바이오테크 기업 등이 의약품, 의료기기 등을 제공하는 분야
특히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헬스케어에서 일하고 싶다”고만 말하면 헬스케어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각 분야마다 특성이 다르고, 요구하는 기술과 경험도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Life Sciences 분야만 보더라도 제약회사, 바이오테크, 메디컬 디바이스로 나뉘는데, 제약회사와 바이오테크는 의약품을 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메디컬 디바이스는 제품의 상업화 과정이나 개발 절차에서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이는 채용의 관점에서 다르다는 것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공통점도 있다. 예를 들어, 이들 모두 규제를 받는 산업이며, 제품과 서비스의 최종 사용자는 **의료기관(의료진 포함)**과 환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빈치라고 불리는 수술용 로봇을 만드는 의료기기 회사이다. 나의 첫 직장이자 헬스케어 산업의 매력을 느끼게 해 준 회사이다. 로봇수술 분야의 선구자이자 시장을 이끄는 마켓리더로 매년 엄청난 성장을 하는 이곳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전 세계 의료진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트레이닝 센터에서 모여 새로운 술기를 익히고, 이를 통해 많은 생명을 구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하면서 회사의 존재 이유뿐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의미 있는 일이 나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헬스케어 산업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 시절에는 헬스케어 산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스타트업 붐이 일었고, 모두가 테크 산업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물론 지금도 테크의 인기는 여전하다.) 그 흐름에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테크 관련 스타트업에서 인턴십을 했고, 이를 발판 삼아 졸업 후 테크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대학 졸업 후 한창 취업 준비를 하던 어느 날, Intuitive(당시 Intuitive Surgical) 인사 담당자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대졸 신입(처음에는 1년 인턴 과정이었으나 대졸 신입으로 변경)을 채용 중인데, 관심이 있으면 지원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헬스케어는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고, 이 회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지원 마감일이 다가와 채용 공고를 다시 읽어보던 중, “실리콘밸리에 본사가 위치한 회사”라는 문구에 눈길이 갔다. 실리콘밸리는 Google, Apple, Meta (당시 Facebook) 등 세계 최고 테크 기업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고 나 또한 언젠가는 이 큰 무대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술용 로봇은 의료기기이면서도 로봇이라는 테크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기에 테크회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 지원 마감일에 맞춰 이력서를 제출했고, 좋은 기회로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2016년 7월 1일, 헬스케어 산업에서 나의 첫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 일이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다. 일요일이 되면 월요일에 회사 갈 생각에 설레곤 했다. 아직은 이 세상에 경쟁을 하는 회사가 없었기에 남들이 안해본 일을 한다는 짜릿함, 의료진들이 우리 회사 제품으로 환자를 살리는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느끼는 일의 가치, 그리고 같은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동료들. 단순한 업무를 넘어 내가 하는 일이 회사의 미션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느낄 때의 짜릿함은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헬스케어를 좋아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내 업무 중 하나는 더 많은 의료진에게 수술용 로봇의 가치를 전달하고, 그들이 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 젊은 산부인과 교수님께 6개월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긴 시간 동안 정말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하셨고 어떤 환자에 로봇수술을 적용시킬지, 어떤 부분에서 로봇수술이 장점이 되는지 등 임상적, 기술적 가치를 깊이 이해하신 분이었다. 긴 교육 과정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교수님이 일하시는 병원에서 마주쳤다. 교수님은 내 쪽으로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 선생님, 방금 로봇 수술로 암 환자를 치료하고 왔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