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에는 춘향사당이 있습니다.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의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워진 영정각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강주수 화가의 춘향 영정이 있었습니다. 강주수 화백의 춘향 영정은 1931년 제1회 춘향제부터 1962년 제32회 춘향제까지 광한루 춘향사당에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당시 송요찬 내각수반이 외국 관광객들에게 춘향을 더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강주수의 춘향 영정을 치우고, 젊고 예쁜 초상화로 대신할 것을 지시하면서 친일 화가 김은호의 작품으로 춘향 영정이 교체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진다고 엄청난 비판을 받았겠지만 그 당시는 그래도 되는 시대였나 봅니다. 그렇게 교체된 김은호의 춘향 영정은 조선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한 것이었습니다.
친일 화가 김은호의 춘향 영정
문제는 이 춘향 영정을 그린 화가 김은호가 문제였습니다. 이당 김은호라는 인간은 조선 말기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 왕의 얼굴을 그린 그림. 초상화)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로 근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 온 근현대시기 대표적인 화가였습니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면서 잠시 독립운동을 했던 적도 있지만, 이내 변절했습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옹호하고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한 그림을 그려 총독부에 헌납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지요. 그 친일활동이 드러나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가운데 미술 분야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지난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지금 윤석열 정부였다면 김은호의 친일행적은 뭐 그저 그런 일이었겠지만 당시 김은호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고, 교체 요구가 이어지자 2020년 9월 제90회 춘향제를 앞두고 김은호의 춘향 영정은 철거되었습니다. 남원의 중요한 관광 콘텐츠를 잃어버린 남원시는 고민에 빠졌고 곧바로 김현철 화백에게 의뢰하여 새롭게 춘향 영정을 제작했습니다.
새 춘향 영정은 4개월여의 제작 기간에 걸쳐 그렸으며, 가로 94㎝, 세로 173㎝ 크기입니다. 새 영정 속 춘향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뿌리 모양 죽절비녀를 꽂고, 금봉채(金鳳釵, 봉황 모양을 새긴 금비녀)로 장식한 낭자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홍치마와 연두색 저고리는 당시 젊은 여인이 즐겨 입은 복장이라고 합니다.
김현철 화백은 이 작품에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이 시대의 여성상을 그리고자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춘향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남원 소재 여자고등학교에서 추천받은 여고생 7명을 참고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18세기 16-18세 여성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가꾸지 않은 본래 한국 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제작 비용에만 1억 7000만 원가량이 들어간 김현철 화백의 새 춘향 영정은 2023년 5월 춘향 영정 봉안식 때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되었습니다.
못생긴 춘향 영정에 발끈한 사람들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예쁜 춘향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몽룡도 못 알아볼 억지 춘향”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국악인들은 “이런 춘향 모습으로 문화재 춘향가를 부를 수 없다"라며 “고귀한 춘향으로 다시 그려 봉안하라"라고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국악인들은 성명을 통해 “새 춘향 영정은 나이가 40~50대로 보이고 얼굴은 남장여자, 의복은 어우동을 연상시킨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반 시민들도 가세했습니다. 남원 지역의 15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남원시민사회연석회의는 “새 춘향 영정이 춘향의 덕성이나 기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새로운 영정이 17세의 젊고 아리따운 춘향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10대라고 보기 힘든 나이 든 여성의 모습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몽룡도 못 알아본다, 이런 춘향의 모습으로는 춘향가를 부를 수 없다, 고귀하지 않다, 어우동 옷을 입었다, 춘향의 덕성이나 기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여러 가지 의견으로 반대의 의사표시를 했지만 결국 못생겨서 싫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전북특별자치도의회 문화안전소방위원회는 최근 '춘향 영정 논란 해법 모색을 위한 공개토론회'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1931년 진주 강주수씨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 영정을 비롯해, 친일 작가로 알려진 1961년 작 이당 김은호의 작품, 2023년 제작된 김현철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토론회 주최 측은 “앞으로도 춘향 영정 논란을 끝낼 수 있는 공론장 마련을 지속해 나갈 것이고 남원시민은 물론 도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춘향 영정 해법 모색에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놈이 그리면 저놈이 지랄하고, 그놈이 그리면 이놈이 지랄하고...”
다 알다시피 춘향전은 소설입니다. 그러므로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라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며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상상해서 이미지화하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춘향의 모습도 그냥 제작자의 마음대로 당시 유명하고 예쁜 배우가 연기했을 뿐입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소설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창작 시기와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 영조, 조선 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치며 현재의 춘향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 속의 춘향이라는 인물을 현대에 와서 재창조하는 것은 누가 그리든 마찬가지 논란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존 인물도 아니고 애초에 소설 속 인물을 영정으로 그린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일로 논란이 되고 시끄러울 거면 차라리 AI에게 맡겨 춘향 영정을 그리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