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만 의존하지 말 것
2005년. 직장을 잡은 그 해로부터 만 13년이 흘렀다. 이직과 전배를 포함해서 4번의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그 사이 나는 코흘리개 사원을 지나, 무장한 싸움꾼 사원을 거쳐 슈퍼 대리, 그리고 무난하게 과장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긴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회사라는 조직에 몸 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내 삶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직장은 분명 그 과정에서 내게 도움을 주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소박한 가정을 꾸려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내가 아이와 함께, 아내와 함께 우리만의 추억을 쌓아 가는 동안 직장이 내게 준 몇 가지가 있다.
§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을 수 있는 기회
§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일정한 소득
§ 직장에서의 자신감과 지위
§ 직장이 주는 '일시적' 안락함. 그리고 그것이 영원할 것 같은 환상
생각해보니 참 열심히 살았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많았다. 그 과정에서 내게 필요한 능력과 회사의 인정은 받았지만 어쩔 수 없는 술자리와 관계 유지를 위한 소모임에 불려 다녀야 했다.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직위에 맞는 역할도 잘 수행해냈다. 나는 그렇게 '충성스러운' 직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처한 현실을 적당히 잘 헤쳐나갈 수 있을 정도로 보상해 주는 직장의 덫을 알지 못했고, 그곳에 묶여 있는 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내 자신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냈다.
그랬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정작 내 자신은 완전히 잊고 살아온 것과 다름없었다. 그저 내게 급여를 주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길들여졌고, 칭찬을 듣고 보상을 잘 받기 위해 원치 않는 일을 잘 해내어야만 되었다. 오로지 내 자신의 삶과 행복을 위한 그 어떤 것도 나는 쳐다보지 못했고, 그마저도 어떤 것들이 내 행복 유전자를 자극하는지조차 다 잊어버렸다. 회사 밖에서의 삶이 훨씬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주는 월급에 중독된 나는 그곳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큰 실수마저도 가끔씩 저질러왔다.
결국, 아빠와 남편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잘 길들여진 노예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그러니까 2017년에 내가 겪은 마지막 변화로 인해 그간 직장인으로 지낸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인식들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지배는 몇 가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 직장에서의 좁아지는 입지
§ 반복되는 위기가 주는, 그간의 '안락함'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
§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났을 때 당장 내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사실
§ 벼랑 끝에 몰린 나를 구해줄 당장의 돌파구가 없다는 사실
§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바심
§ 결정적으로, 직장이 내 남은 인생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뒤늦은 깨달음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나는 지난 2년 동안 내 스스로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나는 확실히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직장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다음 내 스스로의 삶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곳에만 목메는 것은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담보로 맡겨둔, 책임질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직장 생활 11년 차가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각성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직장은 내게 이런 곳으로 정의된다.
더 이상 내 미래를 맡기지 않고 하루빨리 '잘' 탈출해야 하는 곳.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잘' 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모른다. 아직 나도 그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 생각에 다다랐고, '잘' 탈출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직장인의 삶을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만두려 하는 이유를 모두에게 알리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그 이면을 보았다. 그래서, 당연히 누구에게나 더하기 부호로 인식되어 있는 직장이라는 단어에 나는 빼기 부호를 붙이기로 했다.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마다의 생각, 저마다의 환경, 철학을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이라는 곳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더하기보다는 빼기 부호를 붙여보는 상상을 해 보기를 권한다. 빼기 부호가 붙은 후 당장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굉장히 긍정적인 변화나 기존에 없던 과감한 도전과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얻는 것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지만 권해보고 싶다.
나는 꿈이 생겼다.
현실은 물론 녹록지 않겠지만 직장을 '잘' 탈출해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꿈.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갖는 꿈.
그리고 구속받지 않는 하루를 보내며 몇 잔의 커피를 친구 삼아 글을 쓰고 싶다.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