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다른 이들의 선배 이용법
중국생활을 하신 분들도 많고, 지금도 살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중국의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삶의 모습들을 모두 들여다보진 못합니다.
저 또한 아이를 낳았을 때야 비로소 중국 산부인과 병원의 상황, 분유시장, 산후조리시장을 엿보게 되었죠. 지금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중국의 교육 및 과외시장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넓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연관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선후배 관계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한 학년 선배는 그 무엇보다 엄격했고 때로는 폭력을 행해도 그냥 맞아야 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모임을 한두 개 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고등학교 모임입니다. 좀 연식이 있는 학교를 나왔더니 전 세계 곳곳에 선후배들이 있습니다. 상하이에서도 그렇게 모임이 시작되고 있었죠.
우리의 선후배 문화는 엄격하기도 하지만, 얻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밥과 술도 얻어먹고, 인생상담을 구하기도 하죠. 후배의 부탁은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합니다. 그게 선후배의 끈끈함입니다. 물론 사회초창기땐 선배랍시고 전화를 해서는 잡지를 팔던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후배문화는 명明과 암暗이 있는 독특한 문화이기도 합니다.
중국말에는 존칭어가 많지 않습니다.
선후배의 개념도 없죠. 단어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연령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선후배문화의 '명明'은 경험을 못한 이들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언제부턴가 학교별로 동문회 같은 걸 열어서 '세력화'하는 모습을 보긴 합니다만, 극히 일부의 좀 괜찮은 학교들뿐이죠. 후배를 챙긴다는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여줍니다.
무언가 하고 보니 몇 장의 이력서입니다. 근데 자세히 보니 딸아이의 학교아이들입니다.
대학 입학허가서를 받은 고학년 학생들인데 자신의 이력을 꼼꼼히 적어놨더군요.
이게 다 뭔가 싶었는데, 자기 이력이 이러이러하니 아이들 학습지도를 해주겠다 이겁니다.
자랑할만한 학교성적과 좋아하는 과목, 할 수 있는 서비스 등이 적혀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아이들 과외를 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학습지도'죠.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일종의 면담입니다.
시간당 약 300위안(한화 약 5만 원 이상)을 요구하는데, 아내가 관심이 많습니다.
부모들이 딸아이에게 아무리 말해도 잘 듣지 않으니, 학교 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게 해 주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거죠. 학부모들끼리 이런 시장이 공유되어서 아이들 이력서가 돌고 있었나 봅니다. 아내도 다른 부모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세상엔 다양한 시장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전 외국의 한 신문기사에서 '도서관에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대여'해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도서관의 본질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서비스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계를 하면서 공간에 대한 개념을 고민할 때 이 내용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공간의 본질을 고민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좋은 예시죠.
그런데 중국에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학습지도를 하는 이런 서비스 시장이 있네요. 맥락이 비슷한데 여긴 철저하게 소비시장화 되어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요새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애매하고 원칙 없는 모호한 말을 하던데, 실상 살아보면 너무나 자본주의화 되어 있고 '물욕'에 대한 욕망을 부끄럼 없이 강하게 드러내는 사회입니다. 물론 '물욕'이 부끄러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린 좀 얌전하게 배워왔기에 더 큰 차이를 느끼겠죠.
앞선 선배들의 수업노트를 고가에 복사해서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꼼꼼하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노트죠. 부모가 시장에 내놓고 누군가는 '필요해서' 삽니다.
선행학습을 하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죠.
학교에 따라서 학기를 마친 교과서를 회수하는 곳도 있습니다. 선행학습을 막기 위해서일까요? 그런데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판매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자가 있다면요.
아내의 간곡한 바람에 그중 한 아이를 선택해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아내는 여러 아이들의 이력을 꼼꼼히 보다가 심리학과에 입학한 한 학생을 선택했습니다. 본인 공부를 잘하는 것과 잘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면서요. 나름 설득력 있는 분석입니다.
일요일 오전 시간을 잡았는데, 며칠 전 제 딸아이와 먼저 소통하고 싶다고 합니다. 영상통화를 예약하고 서로 얼굴 보는 시간을 가졌죠. 이건 선배아이가 제안한 거라 비용이 추가되진 않습니다. 아내는 거봐라, 역시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르다. 미리 이렇게 준비하는 거 보고는 아주 만족해합니다.
저와 아내는 아이에게 질문할 것들을 준비하라고 다그칩니다.
"핸드폰 사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친구들과 관계는 어떻게?"
"학교 수업은 어떻게 예습하고 복습하는가? "
"등등등"
때가 되어 일요일 오전 우리 아이를 선배아이의 집으로 데려다줬습니다. 집에서 만나자고 했거든요. 며칠 전 영상통화 때 어떤 음료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나 보네요. 딸아이는 눈치 없게 지 마시고 싶은 브랜드를 이야기했는데 미리 준비해 놨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시간이 넘는 '담화'가 이어졌고, 우리 부부는 근처 아울렛에서 시간을 보냈죠. 그러곤 마칠 시간이 되어 딸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차를 타더니 완전 녹초가 되어 있습니다.
배가 아프다네요. 계속 괜찮았는데, 끝나기 얼마 전부터 속이 아프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궁금해 죽겠는 아내를 외면한 채 차에서 계속 눈을 감고 자려고 합니다. 이런 아이를 지켜보는 아내의 표정을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궁금함을 참아야 하니깐요.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는데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배도 안 아프고요.
아마도 낯선 환경에서 많은 INPUT에 과부하가 걸렸나 봅니다.
아이 엄마의 폭풍 질문이 이어집니다.
시큰둥 한 대답으로 아내의 조급함과 아이의 귀찮은 듯한 표정이 대비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뭔가 깨우친 거 같긴 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겠죠.
두 시간 600위안을 송부해 주고, 그렇게 짧은 선배님과의 면담을 마쳤습니다.
상하이에서 상위 수준의 학교와 교육을 시키고 유지하려면, 많은 비용이 듭니다.
한국의 재벌들이 비싼 수업료를 내고 다니네 어쩌네 하는데, 여긴 그보다 더 비싸면 비싸지 결코 싸지 않습니다. 돈만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젊은 엄마들이 홍콩에서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한국의 사교육이 엄청나다고 소문이 나 있지만, 여기 중국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시스템이 덜 되어 있어서 어쩌면 더 폐쇄적이고 더 비쌉니다.
A/S도 해주더군요.
위챗(중국 카카오)을 연결해서 지속적으로 소통을 해주겠답니다.
선배아이가 돈을 벌자고 한건 아닌 듯싶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아이의 엄마는 대학의 영어교수라고 하네요. 집안 분위기가 공부를 하게끔 하는 느낌이 납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조언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교육이 되기로 하죠.
우리 아이에게도 말합니다. 너도 나중에 이렇게 공부를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용돈 벌어야지?
농담이지만 진담이기도 합니다.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방법이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메타인식이란 용어도 있고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 짧은 두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나 영향을 줄지.
이 글을 쓰기 전에 아이와 식사를 하면서 물어봤습니다.
"얼마 전 만난 언니랑 대화 중에 얼마나 깨우친 게 있어? 너 행동에 변화가 있긴 한 건가? "
핑계가 멋집니다.
지금 방학이라 충분히 휴식을 해야 한다네요.
학기 시작되면 분명 바뀐다네요. 그러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부모라는 자리는 인내를 배우는 과정인걸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