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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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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리다 Jan 25. 2019

“흐음”으로 인해 가려지는 것

N의 편지: 첫번째

반가운 당신에게,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밥 한 끼를 함께했습니다.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친구가 묻더군요

“너는 사회 나가서 어떻게 살고 싶어?”

그래서 대답했죠.

“글쎄, 구체적인 건 모르겠지만 일단 돈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제게 돌아온 친구의 반응은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흐음


분명히 당신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 쪽을 살짝 비껴가는 각도로 의미모를 시선을 둔 채,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얼굴로 상대가 내뱉는 무미건조한 그 호흡을요. 마땅히 대꾸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 짧은 몇 초간의 정적에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릅니다.


당시에는 민망하고 무안하여 잠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으나, 실은 저도 마냥 친구 험담만 늘어놓을 처지는 못 됩니다. 당신도 저도 그 "흐음"이 익숙한 것은 아마, 그런 반응을 받아봤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성대를 통해 그 애매모호한 음성을 흘려보낸 경험 또한 적어도 한 번 이상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흐음”은 꽤나 방어적인 발언입니다. 그 반응의 의미를 해석할 책임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흐음" 뒤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 찰나의 시간 동안, 상대의 머릿속은 한없이 분주해집니다.

  내가 방금 한 말을 긍정하는 것일까

  부정하는 것일까

  사실은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뱉는 기계적 반응일까

의도적이든 아니든, "흐음"은 타인이 자신의 생각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는 차단막이 됩니다.


"흐음"도 분명 발화의 의도를 가지고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타인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갈등을 표면화시키지 않고 적당히 무마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지요. 당신도 정치적 견해가 맞지 않는 친구와의 대화를 "흐음"으로 기피해본 경험이 한두 번쯤 있지 않나요? 하지만 "흐음"이 장기간 지속되다 보면 타인은 물론, 자기 스스로마저 본인의 생각으로부터 차단되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흐음"으로 일축된 생각은 발아하지 못한 씨앗과 같습니다. 말이나 글 등을 통해 감각적 형태로 구현된다면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릴 수 있지만, 그저 뇌리를 스치기만 하는 생각은 의식 뒤편에 잠시 방치되었다가 결국 말라비틀어져 사라지고 말거든요. 그다지 중요치 않은 말 한두 마디 정도야 조금 잊어버려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흐음"이 대체하는 것들은 대개 주관적인 견해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흐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라는 주체의 잠재적 표현 공간이 희생되는 것입니다.




"흐음"이라고 지칭하는 이것은, 자신의 생각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모든 말들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침묵과도 같습니다. 어떤 실질적 정보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형식상 발화에 속하기 때문에 마치 침묵이 아닌 양 착각에 빠질 뿐이지요.


"흐음"을 그만둘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왕 이 세상을 살아낼 거라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묻어가기 보다는 그게 무엇이든 "나"의 생각대로 살 권리 정도는 챙겨도 좋지 않은가요. 후회 없는 삶은 없을지 몰라도, 내가 진정으로 나의 생각을 존중한다면 후회를 최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 것이냔 말입니다.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릅니다. "흐음"을 버리는 데 서툴다고 우리에게 비난을 퍼부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대목에 한해 우리 모두는 똑같이 미숙하니까요.




편지를 마무리지으며 당신에게 묻습니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왜 그런 생각을 하나요?

  당신은 지금 품고 있는 그 생각 씨앗을 "흐음"할 것인가요?


마음이 복잡한 겨울날,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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