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시간을 잠시 내어준 당신에게
너랑 얘기를 나누고 나면
이 세상에 색깔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이 말을 들은 것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우중충한 하늘 아래, 온 세상에 짙은 회색 그림자가 진 날이었습니다. 낯간지러운 줄도 모르는지, 그런 말을 던진 뒤에도 선배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습니다.
"너는 진짜 특이한 애야.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해줘. 그래서 너와 만나고 나면 세상이 훨씬 재미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너랑 친구가 된 걸 항상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
원체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진지한 고민까지 가리지 않고 서로 얘기할 수 있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때만큼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가까스로 "고맙다"고만 웅얼거렸습니다.
선배와 헤어지고 귀가하는 길 위에서 슬그머니 후회가 밀려들었습니다. 선배의 말에 멋있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걸. 헤어지기 직전에라도 선배도 나의 정말 소중한 친구라고 한 마디 해줄걸. 익숙지 않은 감각에 혀끝에서 주저한 말들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너 오늘따라 멋지다"는 칭찬에는 "뭐 잘못 먹었냐?"라고 대답해야 진정한 친한 친구라고들 합니다. "고마워. 너도 오늘 입은 옷 잘 어울리네."라며 상대에게 상냥하게 대답하는 말은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본 게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부끄럽다기보다,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한다"는 말이 가볍게 들릴까봐 일부러 표현을 아끼다가 막상 연인에게 말을 꺼내려니 얼굴부터 새빨개지는 사람처럼, 진심이기 때문에 더 내비치지 않은 감정에 대해서는 상대도 나도 면역력이 떨어져 버린 거죠. 또 그만큼 내게 소중한 진심이라서, 상대방이 그 감정을 웃어넘겨버리거나 불쾌해할까 봐 반응을 살피기 두려운 마음도 들고요.
저는 (어쩌면 당신처럼) 직설적인 감정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에요. 논리적인 자기 주장은 눈치 보지 않고 툭툭 내뱉지만, 조금이라도 감성적인 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우선 심호흡부터 해야 하죠.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하냐고요? "스릉흔드"조차 버거운걸요.
하지만 때로는 모종의 고마움을, 미안함을, 사랑스러움을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이런 모습도 내 일부라는 걸 네가 알아주면 좋겠어!"라고 외치고 싶을 때 말이에요. 그럴 때면 어김없이 책상 한 켠에 놓인 편지지를 들춘답니다. 마음의 수도꼭지를 비틀어 열고 혀끝의 말들을 손끝으로 흘려보내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손편지 한 통을 우체통에 밀어 넣는 자신을 발견하곤 해요.
손편지의 묘미는 나의 진심을 어색함 없이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걸 정말 써도 되는 걸까'하고 잠시 멈칫하게 되는 순간들은 있지만, 그 찰나의 망설임을 넘기는 일은 생각보다 쉽답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알을 굴릴 상대방이 다행히도 당장은 내 눈앞에 없으니까요.
글은 말보다 표현의 폭이 넓습니다. 대화할 때 쓰기 어려운 문어적 표현들을 사용해도 되고, 길고 복잡한 논리도 종이만 있다면 끊기는 일 없이 설명할 수 있어요. 어떤 말로 표현해도 감정이 온전히 담기지 못할 것 같을 땐, "어떤 말로 표현해도 내 감정이 온전히 담기지 않을 것 같다"라고 써도 전혀 바보같아 보이지 않는 마법까지 작용한답니다.
다 쓴 편지를 우체통에 밀어넣기 직전, 마지막 망설임이 들이닥칠 때도 있어요. '이걸 부쳐도 되는 걸까?' 그럴 땐 두 눈 질끈 감고 편지봉투가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조금 못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부끄러움은 네 몫"이라 생각하며 혓바닥 한 번 쏙 내밀면 그만이랍니다.
우중충했던 그 날,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선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주 솔직하게요. "나는 선배처럼 말로 진심을 표현하는 건 역시 잘 못하겠어. 그래도 손편지라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결과는 어땠냐고요? 한없이 값진 인연을 얻는 대가는 340원짜리 우표 한 장 값으로 충분했다고만 할게요! ;)
우중충한 날 창 밖을 내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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