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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zi Apr 27. 2024

安子,Who are you?

10부   安子,Who are you?

21화 .安子,후아유? 


    아내랑 함께 한국에 정착하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중국어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알바를 뛰고 있고 나는 중국에 컨설팅법인을 만들어서 한국기업들에 중국투자유치나 중국바이어 발굴, 중국진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있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달 한두 번 정도 중국출장을 다녔는데 코로나가 터지고는 거의 3년간 중국에 못 갔었고, 지난해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어떨 땐 한국기업사장님들 모시고 함께 가기도 하고 어떨 땐 사업파트너랑 함께 가기도 한다. 

    중국법인은 광저우시에 있고 나를 포함 모두 8명의 주주가 있는데 주주들 대부분은 유명 투자사 임원이나 펀드사 CEO들이고 다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엘리트들이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 제일 어린 친구는 30대 초반이다. 아들뻘인 셈이지만 나랑 대화도 제일 많이 하고 농담도 거리낌 없이 하는 그야말로 망년지교, 막역지우인 셈이다. 중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과 달리 나이, 학벌, 학연, 지연 이런 거 별로 따지지 않는다. 한국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선배님 후배님 이런 호칭이나 형 동생 이런 것도 이들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다. 이들은 뜻이나 취미 등으로 친구를 사귀며 나이차이나 성별, 이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내가 아들뻘인 젊은 이와 친구 "먹"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중국사람들은 첫 만남부터 모두 친구(朋友,펑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번 만나면 라오펑유, 그러니까 오랜 친구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말로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진 않는다. 중국사람들은 사람을 사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중국 속담에 "로요지마력, 일구견인심(路遥知马力,日久见人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말은 타 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엄청 예의 차리고 친절한 모습은 단지 그들의 습관일 뿐이고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할 수 있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럼 "검증" 단계를 거치면 중국사람들은 친구에 대해 굉장한 신뢰를 가지게 되고 그런 관계가 아주 오래 유지된다. 이건 술자리만 가지면 형 동생이 되고 친구가 되는 한국사람이나 조선족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내가 중국사람들한테 탄복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 흉을 보지 않는다. 현장에 없는 제삼자 얘기를 잘못했다가는 바로 신뢰를 잃으며 더 이상 친구 "대접"을 받지 못한다. 나는 내 중국지인들이 내 앞에서 내가 아는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비난하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중국지인들은 나를 "안즈(安子)"라고 부른다. 중국사람들은 친구나 어린 친구들을 부를 때 성(姓)이나 이름 첫 글자나 마지막 자 뒤에 자(子)를 붙여서 부르는데 친근함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李子,金子,朴子,东子,铁子,惠子,亮子 등등 이다.

    이 친구들이 나랑 함께 컨설팅회사를 만든 이유는 모두 한국기업의 "매력" 덕분이다. 내가 한국에서 진행했던 투자 관련 행사(IR)에 참석했던 중국 투자사 담당자들이 한국기업의 높은 기술 수준과 중국 대비 10배 이상 저평가된 기업가치를 보고 함께 한국기업을 발굴해서 투자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어느 친구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날 하루동안 10개 한국기업의 IR 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강남의 어느 유명한 닭백숙집에서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 그때 나이로 2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던 내 망년지교 친구가 식사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오늘 보니 한국기업들 기술력이 대단한 거 같아(중국어는 경어가 없다). 적어도 중국기업들보다는 5년 이상 앞서 있는 거 같아. 이런 기업들을 발굴해서 중국에 유치해서 투자하면 성공확률이 높을 거 같아." 

    이 친구는 대학교를 졸업한 지 2년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어느 유명한 투자사에서 투자총책을 맡고 있었다. 재벌 2세도 공산당 2세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아마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파격적인 인사대우겠지만 그런 일은 중국에서는 비일비재했다. 중국은 연륜이나 학벌이나 이런 걸 따지지 않는다. 오직 실력만 본다. 

    그 자리에 있던 대형 투자사 임원, 펀드사 CEO 등이 그 친구 말에 동조했다. 그런 행사를 몇 번 치르고 나서, 어느 날 광저우에 출장 갔던 나는 어느 술자리에서 동업해서 한국기업 발굴 전문 컨설팅회사를 함께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가 관심을 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뜻이 맞는 8명이 모여서 컨설팅법인을 설립했고 지금까지 8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이 친구들을 통해서 나는 수많은 대기업, 상장사, 투자사들을 소개받게 되었고 그 자원들이 내가 한국기업들을 도와 중국시장을 개척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나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많은 한국기업 대표님들이 우리 주주들과 그들이 소개해준 대기업이나 상장사를 만나고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일개 조선족인 내가 어떻게 이런 인맥들을 갖고 있는지. 

    사실 그건 간단하다. 신뢰를 지키고 그들 한데 이익을 가져다주면 된다. 적어도 당분간 이익을 주지 못하더라도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 된다. 아마 이건 한국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광저우 출장을 갔던 어느 날, 주주 한분이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우리는 절강호텔 내에 있는 서호공관이라는 대형 식당에 모었다. 우리가 광저우에서 IR행사나 엑세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자주 이용하는 최고급 항저우요리를 맛 볼 수 있는 식당인데 한화 20-30만원이면 10명이서 최상의 중국요리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 자리엔 처음 본 얼굴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중국 국무원 산하 어느 싱크탱크 소속 박사였다. 다들 그를 호주임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에서 주임이라는 직책은 한국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최하위 직책이 아니라 한 개 기관이나 부서의 부서장이나 센터장을 부르는 호칭으로 권력이 '막강'했다. 나도 한때는 국가공단 외자유치센터 부주임 명함을 파고 다닌 적이 있었다. 술자리를 마련한 주주가 호주임한테 일부러 나를 한국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다들 우스개인 줄 알았지만 호주임은 진짜로 여겼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호주임이 궁금한지 나한테 물었다. 

    "안즈(安子), 당신은 한국사람인데 중국어를 어떻게 이렇게 잘합니까? 혹시 중국에서 유학했나요?"

    다들 하하 웃었고 나는 '사기꾼'이 되기 싫어서 나는 중국 조선족이라고 '실토'했다. 그랬더니 호주임은 상당히 '실망'해 하는 눈치 었다. 그는 술자리 내내 혹시라도 내가 중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할까 봐 일부러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는데 내가 '중국인'이라고 하니 김이 빠진 모양이었다. 

    호주임이 물었다. "그럼 조선족이랑 한국인이랑 무슨 사이입니까?" 

    중국 싱크탱크 박사님조차도 이런 질문을 하다니, 나는 또 다시 조선족 역사와 한국, 북한과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어쨌든 간에 조선족도 중국사람인 거죠?" 내 설명을 듣고나서 호주임이 물었다. 

    "호주임, 미국에서 사는 중국인은 중국인입니까? 미국인입니까?" 내가 되물었다. 

    뜻밖의 날카로운 질문에 호주임이 흠칫 놀라는 눈치 었다. 

    "해외에서 사는 중국인들은 우리는 화교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도 화교죠." 호주임이 '중국'스러운 대답을 했다. 

    "그럼 한국입장에서 보면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은 중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까?" 

    "......" 호주임이 대답을 못했다. 

    "미국에서 사는 화교는 중국계 미국인라고 하니,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들은 한국계 중국인이라고 해야 맞겠죠? 한국사람들은 우리를 중국동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조선족은 국적상 중국인이 맞는 거죠." 

    내가 설명하자 호주임이 오늘 많이 배웠다며 건배를 제안해 왔다. 

    한편에서 말없이 우리 얘기를 듣던 막내 주주가 한마디 했다. 

    "나는 당신의 그 양국 정서가 이해되지 않아. 중국인이면 중국인, 한국인이면 한국인인거지 당신처럼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건 대체 무슨 기분인지 이해가 안 돼." 

    그리고는 내 빈 잔에 술을 잔뜩 따라 주었다.


    그렇다. 아마도 대부분 조선족 동포들은 나처럼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민감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조선족 동포들은 그냥 중국인으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고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하고 자신들에게 훨씬 더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 와서 내가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고 중국에서 살든 한국에서 살든 내가 편하게 살면 그만 이자나 하는 실용적인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내 어머니의 경우가 그렇다. 어머니는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에서 태어났고, 만주땅에서 장사를 하던 외할아버지가 일본패망 3년 전에 고향에 논밭을 장만하러 들어왔다가 외할머니와 큰 이모, 그리고 한 살밖에 안된 엄마를 데리고 만주로 데려갔다. 그때는 외할아버지도 일본이 그렇게 빨리 패망하고 당신은 한국 고향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친할아버지도 본 적 없거니와 외할아버지도 본 적 없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두 분 어르신은 모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오남매의 맏이었고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었고 남동생 둘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만주로 이주했고 여동생 둘은 출가해서 충청도에서 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만주에서 구체적으로 뭘 하셨는지는 모른다. 외할머니도 작은 외할아버지도 내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둘째 남동생이 일본군에 잡혀 갔다가 일본 패망후 감옥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분 모두 전염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 밖에 모른다. 어머니 기억으로는 어떤 사람은 외할아버지와 둘째 남동생이 항일무장단체에 식량을 지원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돌아가셨다고 하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마루타"로 잡혀가서 전염병 인체실험을 당해서 돌아가셨다고 하기도 했다. 어쨌든 내 외할아버지와 그분 동생은 일본군에 잡혀 갔다가 풀려난 후 두분 다 갑자기 사망했고 그 때문에 내 어머니는 다섯살에 아버지와 삼촌을 잃고 어린 시절을 홀어머니 슬하에서 힘겹게 살아 오신 것이다. 내가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다.


    암튼, 외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장사해서 번 돈으로 1942년 충청북도 옥천군 고향에 논 3000평을 사서 여동생들에게 맡겨 부치게 하고는 당신은 처자식 싹 다 데리고 다시 만주로 들어갔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직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에 대한민국 호적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대한민국 호적이 아니라 "대일본제국" 호적이다. 나는 그 호적도 족보에 끼워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국 국적을 회복할 생각이 없다. 30년 넘게 중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퇴직하신 어머니는 다달이 퇴직금도 꼬박꼬박 나오는데 매년 월급이 인상되어 지금은 150만원 정도 받는다. 내가 우스개로 공산당정권 초기에는 고생만 했는데 지금은 퇴직금도 다달이 두둑하게 나오니 120살까지는 살아야 본전 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말만 들어도 흐뭇하신지 이가 다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즐거워 하셨다. 중국에서는 노후가 보장되어 있는데 한국국적을 회복하면 그 모든 걸 다 포기해야 하고 그렇다고 한국정부가 그걸 보상해 줄리도 만무하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한국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가 남긴 논 3000평은 친척들이 부치다가 벌써 50년 전에 팔아 치웠고 거기에 대해 한 푼도 보상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어머니와 이모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사촌형제들은 어머니와 이모를 냉대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한국 사촌형제들과 별로 왕래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한국사람들은 인심이 박하다고 생각한다. 물가도 싸고 인심도 좋은 대오사구 마을에서 순박한 고향사람들과 어울려서 여생을 보내는게 낙이라고 하신다. 

    어머니를 포함해서 대다수 조선족 동포들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나 중국사람이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족보에 계신 조상님들이 무서워서 아직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내 국적에 대해 물으면 "나는 중국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애매하게 "나는 중국국적 조선족이다"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나도 내가 도대체 중국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엄청 궁금하다. 누군가가 그랬다. 조선족 동포들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방법은 중국축구팀과 한국축구팀 가운데 어느 팀을 응원하냐로 결정할 수 있다고. 과연 그럴까? 30대까지는 나도 중국축구를 응원했었다. 그리고 그때 중국축구는 꽤 괜찮았다. 조선족인 고종훈선수를 비롯해 적지 않는 조선족동포 선수들이 활약했었고 아시아컵 결승전에 오를 정도로 나름 잘했다. 하지만 중국축구는 점점 조선족선수들을 배척했고 지금은 베트남이나 태국에도 지는 3류 약체로 타락했다. 그래서 나는 중국축구에 대한 관심을 끄고 산지 20년도 넘는다. 하지만 난 한국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뭐라고 하면 기분이 나빠져서 한바탕 따진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이 한국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면 또 한바탕 따진다.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까? 난 대체 누구일까? 





안즈(安子) 프로필: 


1969년, 중국 동녕현 대오사구에서 순흥 안 씨 사용공파 28 세손으로 출생. 

1981년,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남조선방송 접촉. 

1985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 한국노래 처음 접촉. 

1986년, 중국 우체국에서 대한민국 "주권"을 지키려다 실패.(결국 주소를 남조선이라 썼음) 

1988년, 연변대 한국어학과 입학, 서울올림픽 개막식 시청. 

1990년, 한국 김사장한테서 DAKS 넥타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책 선물로 받음. 

1992년, 연변대 교실에서 한국대학생들 조우.(의문의 1패 당함) 

1993년, 한국기업 취직. 

1994년, 한족 아내랑 결혼. 

1996년, 순흥 안 씨 사용공파 29대손인 아들레미가 북경에서 출생. 

2000년, 한국 첫 방문. 아버지 고향 철원군 이길리 방문 무산됨. 

2004년, 한국기업의 부동산 불법 매매로 중국공무원직 사직. 

2011년, "한국통" 포털사이트 창업, 전재산 날림. 

2014년, 한국정착 1년 차. 제2의 인생 시작. 

2024년, 한국정착 10년 차. 

2050년, Who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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