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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zi Apr 15. 2024

安子, Who are you?

3부   굳바이 첫사랑, 응답하라 1988

7화.  굳바이, 첫사랑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다른 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하도 놀러 오라고 해서 머리도 식힐 겸 그 동네에서 며칠 놀다 왔는데,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다. 

    겨울철이라, 해도 짧아서 밤이 금방 찾아왔고 우리는 저녁을 대충 먹고는 방안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담배를 피웠다. 필터도 없는 독한 담배라 좁은 방안에는 금세 뽀얀 담배연기가 자옥했고 지독한 니코틴 냄새가 진동했다. 친구 놈들이 하도 권해서 나도 한 개비 피여 물었다. 인생 첫 담배다. 순간, 독한 연기에 사례가 들어 연거푸 기침을 해댔고 친구 놈들은 그게 재밌다고 박수를 치며 놀렸다. 그렇게 한 개비 한 개비 바꿔 물면서 니코틴에 취해 정신이 해롱해롱 하고 있을 때, 친구 놈들이 "가보자!"하면서 하나 둘 일어났다. 그리고 언제 준비했는지 부엌에서 저마다 손전등이며, 드라이버며, 방망이며 자루 같은 걸 챙겨 들고 문을 나섰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새카맣게 어두운 밤이었다. 맵짠 겨울바람이 얼굴을 할퀴며 스쳐 지나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맨 뒤에서 친구 놈들을 따라 정신없이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던 친구들이 어느 기와집 뒤편에서 가만히 멈춰 섰다. 주변 동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담을 넘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거니와 겁도 더럭 나서, 담밖에 서서 그들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친구 놈 몇몇은 살금살금 기와집 한편에 낮게 지은 닭장으로 향했고, 한놈은 기와집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창문으로 집안 동정을 살폈다. 

    닭장 문을 따고 들어간 팀은 2분도 안되어 다시 나와서 담을 넘어왔다. 바람소리가 커서인지 그들이 닭장으로 들어간 동안 나는 닭 울음소리 같은 걸 전혀 듣지 못했다. 모두 담장을 빠져나와 다시 오던 길로 해서 친구네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 손에 들린 자루는 묵직하게 차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 짓거리를 얼마나 했으면 이런 "범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사천리로 몇 분안에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친구네 집으로 들어가서 자루에 든 것들을 부엌 바닥에다 쏟았다. 큼직한 토종닭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부 여섯 마리 었다. 그런데 모두 죽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닭장에 들어가서 한 마리씩 붙잡고는 들고 간 방망이로 머리를 쳐 기절시켰다고 한다. 

    그들이(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닭을 훔치러 간 사이, 집에 남아 있던 친구는 큰 가마솥에 물을 가득 끓여 놓았다. 그리고 큰 대야 2개를 가져다가 닭을 각각 3마리씩 넣고는 그 위에 끓은 물을 퍼부었다. 순간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서 나는 친구 방으로 도망쳤다. 담배를 피워 물고, 친구 책상에서 대만 작가 경요의 소설 <기도석양홍>을 뽑아 들고 읽었다. 소설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 놈이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밥 먹자!" 


    안방에 차린 커다란 밥상에는 갓 삶아 낸 닭고기가 큰 대야에 듬뿍 담겨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고, 김치며, 고추장아찌며 여러 밑반찬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저녁을 대충 먹은 지라, 맛있는 닭고기 향을 맡자 배에서 꼬르륵 하고 반응이 왔다. 

    그날 나는 혼자서 닭백숙 한 마리는 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5kg짜리 물통에 가득 담긴 50도짜리 빼갈을 일곱이서 다 마셔버렸다. 술이 술을 부른다고, 다들 거나하게 취한 막판에는 아예 사발에다 부어 마셨다. 

    그날, 내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왕창 퍼 먹은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일로 나는 1년 가까이 사귀던 첫사랑 그녀와 싱겁게 헤어졌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친구 한놈이 갑자기 나한테 섭섭하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이 자꾸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는데도, 그 친구는 끝내 "진실"을 털어놓고야 말했다. 

    

    사연은 이랬다. 

    오늘 집을 내어 준 친구는 우리와 동갑내기인데, 읍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성적이 모자라서 진학을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랑은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다. 중학교 다닐 때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고, 둘은 여자애가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한동안 사귀고 있었는데, 올봄에 헤어졌다고 한다. 

    "그 여자애가 옥희야." 그 친구를 대신해서 구구절절 사연을 읊은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우린 그때 하마터면 너를 때려 줄뻔 했었어." 

    집을 내 준 친구가 "다 지나간 얘기라고, 그걸 왜 꺼내냐" 라고 하면서 사연을 털어놓은 친구 놈을 나무랐다. 그리고는 오히려 나를 위안했다. 

    "괜찮다 동훈아, 다 지나간 얘기야. 부담 같지 마. 옥희 좋은 애야. 잘해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담배를 피워 무니, 그 친구는 "자자, 술이나 먹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하면서 자기 사발에 가득 부어있던 술을 한 번에 완샷해 버렸다. 

    나도 반사적으로 사발을 들어 완샸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나는 필름이 끊어졌다. 술자리가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닭파티 때 들은 그 "사연"은 내게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나의 첫사랑이 다른 사람한테는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잘 만나주지도 않았고, 내가 보고 싶어서 우리 동네까지 놀러 온 그녀와 대화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냥 일관되게 쌀쌀한 표정으로 대했다. 그런 상황이 한 달 넘게 지속되자,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어느 날 기숙사로 찾아와서 나를 불러내더니 <일한사전>이며, 그녀 생일이나 새해 선물로 줬던 만년필 같은 물건들을 나한테 돌려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갔다. 난 아차 싶었지만, 그녀를 잡지는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난 실망과 경멸을 읽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다음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휴학계를 냈다고 했다. 반에서 공부를 꽤 잘했던 그녀를 두고 다들 의아해했다. 휴학은 그냥 형식이었고, 그 후로 그녀는 다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한때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동네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녔고 그 후 고향을 떠나 먼 도시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첫사랑 그녀에게 정말 몹쓸 짓을 한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때는 어려서 사랑이 뭔지 잘 몰라서 그랬을 거야, 하며 핑계를 찾아 자기 위안도 해 보지만 내가 저지른 짓은 정말로 비겁하고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38년이나 흐른 지금, 나도 그녀도 다 한국에서 살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회장까지 맡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처럼 활발하고 배려심이 많은, 그리고 웃을 때 보조개가 이쁘게 피는 아줌마가 되어 있다. 이젠 동창 모임에서 나를 만나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일이 바빠서 동창회에 못 나갈 것 같다고 하면 막 야단치고, 인생 그렇게 살지 마, 하며 훈계까지 해준다.   







8화.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는 <나의 아저씨> <슬기로운 의사생활> <겨울연가> 등과 함께 내 인생 드라마 TOP 10에 이름을 올린 작품들이다. 나는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를 여러 번씩 반복해서 읽거나 보는 습관이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도 그렇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래서 1988년은 드라마까지 만들 정도로 한국사람들에게는 특별한 한 해 었나 본다. 

    1988년은 나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한 해 었다. 그해 실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 일들이 상호작용하여 내 인생을 지금처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1988년,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난 연변대학교 한국어학과(그때는 조선어학부라고 불렀다)에 입학했다. 중국 동포사회 최고의 대학교다. 지금은 중국 211개 중점대학교 가운데 하나지만, 그때의 연변대학교는 별 볼일 없는 일반 지방대였고, 내가 원하던 대학교는 아니었다. 성적이 별로여서 1 지망 대학교는 못 갔고, 2 지망으로 적은 연변대학교에 덜컥 입학했다. 지금은, 중국도 대학입시가 끝난 후에야 성적표를 받아 보고 대학교 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이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대학입시를 보고 나면, 학교에서 가서 각 과목 담당선생님과 함께 다시 한번 대학입시 시험지를 마주한다. 내가 몇 점이나 맞았을지를 정답지와 대조해서 미리 체크하는 것이다. 대학입시에서 총점 얼마를 받을지를 예측하고, 그걸 바탕으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교를 고르는 것이다. 중국은 나라가 큰 만큼, 대학교도 많다. 아마 수천 개는 될 것이다. 그 많은 대학교를 중국은 211 중점대학교, 895 중점대학교 등으로 중점대학교와 일반 대학교를 구분한다. 물론 211 중점대학교 중에서도 칭화대, 북경대, 하얼빈공대, 푸단대 등 10여 개 중점대학교가 단연코 모든 입시생들의 로망이었지만, 나 같은 시골뜨기 학생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수 천 개 대학교는 인지도와 교육, 연구 성과 수준에 따라 1 지망, 2 지망, 3 지망, 4 지망 대학교로 분류되고, 우리는 자신들의 수능 예측 점수를 가지고 각 레벨의 대학교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대학 수능 점수를 전혀 모른 채, 그저 미리 예측한 점수를 가지고 내 인생을 좌우할 대학교를 깜깜이 방식으로 골라서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측 점수 차이가 너무 커서, 원래는 얼마든지 북경대 같은 유명대에 입학할 수 있는 수능점수를 받았음에도, 예측 점수를 너무 낮게 잡아서 유명대를 못 간 친구들이 중국 각지에 수백 수천은 된다고 한다. 반대로, 예측 점수를 너무 높게 잡아서, 1 지망이나 2 지망 대학교를 너무 무리하게 선택해서, 결국은 3 지망이나 4 지망 대학교에 간신히 붙은 학생들도 부지기수다. 

    난 그나마 예측 점수가 실제 수능점수보다 차이가 별로 크지 않았다. 6과목 660점 만점에 나는 예측 점수가 470점, 실제 점수가 459점이었다. 각 레벨별로 2개 대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내 주제를 잘 아는지라, 어차피 붙지도 못할 1선 중점대학교들은 그냥 패스했고, 1 지망 대학교는 중점대학교인 북경중앙민족대와 대련공대 , 2 지망은 흑룡강대만 적었다가 담임선생님이 "혹시 모르니까 연변대도 적어 봐, 사람 일은 모른다"라고 하시기에 별생각 없이 연변대를 적어 넣었다. 3 지망과 4 지망은 모두 2년제나 3년제 단과대학인데, 어떤 학교를 선택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난 그때 근거 없는 자신감에 느낌상 왠지 1 지망인 대련공대에 붙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흑룡강대나 연변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 원서 제출도 마치고 나서, 나는 혼자서 밀산 이모네 집으로 놀러 갔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 한 번도 사촌누나를 보지 못했다. 많이 보고 싶었다. 물론 편지 왕래는 있었다. 사촌누나가 편지에서 수능이 끝나면 밀산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사촌누나는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키도 크고 잘 생긴 남자다. 그녀는 남자친구랑 같이 나를 데리고 대형 농장도 구경시켜 주고 흥개호도 놀러 갔다. 7월의 5811 농장은 광활한 평야가 푸른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고 드문드문 젖소 떼들이 유유자적 거닐며 풀을 뜯고 있었는데 파란 하늘에 핀 흰 구름과 젖소들의 흰 무늬가 마치 맞춰 입은 옷처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어떤 날엔 하늘을 부숴버릴 듯한 벼락과 천둥이 번갈아 내리치며 폭포수 마냥 먹구름이 하늘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런 풍경은 대오사구같은 산골짜기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하고 웅장한 풍경이었다. 그렇게 수능은 까맣게 잊은 채 신나게 여름방학을 즐기다가 나는 7월 말에야 부랴부랴 대오사구 마을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대학교 입학통지서가 날라 올 것 같아서. 


    8월 초순쯤 되자, 하툰에 사는 여자애가 입학통지서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해 더 재수를 한 이 여학생은 소원대로 북경중앙민족대에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랑 한 테이블을 썼던 짝꿍도 흑룡강대 입학통지서를 받았다고 한다. 난 왠지 불안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중점대학교 입학통지서가 며칠 먼저 도착하고 일반 대학교 통지서도 늦어도 8월 중순까지는 모두 도착한다. 그래야 9월 1일에 통일적으로 개학하는 대학교 개강 일정에 맞추어 학생들이 입학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어느 날, 아버지가 나에게 슬쩍 물었다. 만약 연변대에서 통지서가 오면 갈 생각있냐고. 내가 연변대는 별로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아버지는 아신다.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안 간다고 했다. 연변대를 가느니 차라리 1년 재수해서 더 좋은 중점대학교를 가겠노라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또 며칠 지났지만, 입학통지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이쯤 하면 중점대학교는 물 건너간 것이다. 내가 며칠 동안 불안해서 안달아나하다가 또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이니 아버지가 나를 당신 방으로 불렀다. 아마도 이번에는 글렀으니 재수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나를 위안해 주시려는 거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 침대에 걸터앉아 아무 말도 안 하고 창밖만 물끄러니 내다보고 있을라니, 아버지가 조용히 서랍을 열고 누르끄레한 편지봉투를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봉투 상단에는 멋있는 붓글씨체로 "연변대학교"(나중에 알고 보니 모택동주석의 친필이라고 했다)라고 빨간 한자로 크게 찍혀 있었고 바로 밑에 "대학교입학통지서"라고 정자체로 찍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 통지서를 내용물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 구겨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여기는 안 가요!" 

    혹시라도 내가 다시 주어서 찢어 버릴까 봐 아버지가 다급하게 그걸 주어서 박박 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씩씩거리며 아버지 방을 나와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아무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국경강에 갔다가 다시 습지 주변으로 길게 형성된 갈대숲 길을, 그리고 다시 발길을 돌려 마을로 향했지만 집에 들어가 그 통지서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다시 국경강으로 갔다.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검은 화산석으로 쌓은 제방둑에 앉아서 큰 소리로 여울목을 지나는 강물소리를 들으면서 멍하니 반대편 러시아 수변의 울창한 갈대숲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빠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쩔래? 한해 재수 할까? 성적이 낮은 한어와 일본어를 좀 더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성적을 30 점 정도 끌어올린다면 중점대는 얼마든지 갈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수능공부 한해 더 한다는 것도 솔직히 공부에 게으른 나한테는 너무 힘들어. 그냥 연변대 갈까? 다른 애들은 이런 대학교라도 가지 못해 그러는데...


    사실, 그 입학통지서는 며칠 전에 이미 도착했었다. 나보다도 마음이 더 조급했던 아버지가 읍내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우체국에 가서 내 입학통지서가 도착했는지 살폈고, 며칠 전에 그 통지서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내가 하도 연변대는 안 간다고 해서, 아버지도 선뜻 내주지 못하시다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꺼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연변대에 붙은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고 했다. 우리 대오사구 마을에서 거의 5,6년 만에 대학생이 하나 나왔으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연변대가 어때서? 엄연히 4년제 종합대학교인데.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연변대학교는 보란 듯이 중국 국무원으로부터 211 중점대학교로 지정되었고 이제는 나 같은 시골뜨기가 모자란 성적으로 함부로 갈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중점대학교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20여 개 학과에 의대, 농대, 과학기술대, 체대, 예대 등 여러 개 전문대를 거느린, 학생 수만 2만 명이 넘는 어엿한 지방 허브 교육플랫폼으로 변모하였다. 

    연변대학교에 등록하던 날, 교무처 직원선생님이 주글주글 주름이 생긴 내 입학통지서를 보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학생, 우리 학교가 싫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돌아가세요." 

    난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대학교 입학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계획경제시대를 길게 겪은 중국은 모든 것이 국가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형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년 각 대학교 그리고 각 학과는 학생을 몇 명 뽑아야 하고 그 학생들은 졸업 후 어디로 보내져야 하는지까지 모두 계획되어 있는데 대부분 지정 기관이나 국영회사 같은데서 채용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대학교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무원이나 고등학교 선생님을 해야 할 "팔자"였다.

    그렇게 각 성, 각 대학교별로 학생을 모집했는데 통계를 보면 대략 100명 입시생중에서 5명만이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보니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지방대라 할지라도 그 당시 대학생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왜냐 하면, “철밥통”을 보장해 주니까. 

    그리고, 1988년까지 중국대학교는 등록금이 없었다. 등록금이 무료일 뿐만 아니라 기숙사도 무료, 심지어 생활비도 월급처럼 지급해 주었다. 물론 장학금 성격이고 성적에 따라서 1등, 2등, 3등 장학금으로 나뉘며 성적 상위 5등 안에 들면 1등 장학금을, 상위 15등 안에 들면 2등 장학금을, 나머지는 3등 장학금을 받게 된다. 한국사람들이 들으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그때 중국은 그랬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학생 신분임에도 사회적으로 공무원 대우를 받았고, 다들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9년이 되자 등록금이라는 "이상한" 제도가 발동되었고, 무료 기숙사도 유료 기숙사로 바뀌었고 모든 학생들에게 지급하던 장학금도 소수의 상위 학생들에게만 지급되었다. 88학번과 89학번은 불과 1년 안에 극과 극이 된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 하겠지만, 중국이라서 가능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중국은 불가능이 없는 나라라고... 

    암튼, 나는 그렇게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한 달 전에 온통 주름투성인 입학통지서를 가지고 꽤 순조롭게 연변대학교에 "입성"한다. 그러고 나서 한 달간, 우리는 또 연변대학교의 새 역사를 쓴다. 다름 아닌 군사훈련이다. 우리 이전의 대학생들은 군사훈련이라는 과목이 없었다. 왜 갑자기 대학교에서 신입생들에게 군사훈련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지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한 달 동안의 군사훈련 기간, 우리는 군사과목을 제외하고는 어떤 강의도 듣지 않는다. 기본 동작부터 소총 사격, 3일간의 대장정 등 고된 군사훈련이 끝나면 그제야 정상적인 대학교 수업이 시작된다.


    1988년 9월 17일 토요일 오전, 반장이 지난 보름동안 많이 친해진 친구들 몇 명을 자기네 집으로 불렀다. 반장 아버지는 우리 조선어학부의 교수님이셨는데 그날은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 아마도 아들레미가 반 친구들을 초대한다니 자리를 비켜 주신 모양이다. 오늘, 잠시 후 서울올림픽 개막식이다. 

    9시쯤 반장네 집에 도착하니, 거실에 틀어 놓은 티브이에서 중국 관영방송인 CCTV 채널에서 이미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난 그동안 시골동네에서 살다 보니 서울올림픽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가 여기 연변대에 와서야 다른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살아 그런지 세상일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고 특히 한어(중국어)를 잘했다.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도 주로 한어로 대화했다. 

    내 기억으로는 1984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 개막식이랑 그리고 중국이 잘하는 탁구와 배구 경기를 실시간으로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12인치 흑백티브이어서 그런지 별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다. 아니,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중국대표팀 입장 장면이다. 그때 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중국대표팀은 블랙 재킷에 하얀 바지 차림에, 양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그 흔한 작은 국기나 꽃다발도 없이) 군대처럼 대열을 맞춰서 헛둘헛둘 하면서 입장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대표팀들은 다들 자유자재로 손에 든 미국국기나 자국 국기를 흔들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희희낙락 걸어 들어오는데, 유독 중국대표팀만이 경직된 표정으로 대열을 맞추어 마치 열병식에 나가는 군대처럼 입장했다. 그것도 자그마치 200여 명이서. 지금도 올림픽 개막식 장면을 시청할 때면 그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번 서울올림픽은 교수님 댁에서 24인치 "대형" 컬러티브이로 시청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티브이를 보면서 신나서 떠들었다. 드디어 본 개막식이 시작되고, 여러 순서가 끝나자 어린 남자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천천히 달려 나왔다. 굴렁쇠는 나도 어릴 때 좀 굴려 봤었다. 그런데 올림픽 개막식에 웬 굴렁쇠? 하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굴렁쇠가 넘어지면 어쩌냐 하고 다들 숨 죽이고 그 아이를 지켜보았는데 다행히도 넘어지지 않고 잘 마무리되었다. 개막식 클라이맥스는 코리아나 그룹이 <손에 손 잡고>를 부를 때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조용필, 나훈아 이런 가수들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가수 4명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조금은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남자가수가 부드러운 톤으로 "하늘 높이 솟는 불...> 하고 노래를 시작하자 우리는 모두 와하고 감탄을 연발했다. 곧이어 여가수가 굵직하고 웅장한 목소리로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하고 부를 때 나는 순간 가슴이 벅차 올라 울컥했다. 곡도 웅장하고 좋았지만 가사는 너무 마음에 와닿았고, 더군다나 내 모국어인 한국어로 올림픽 주제가를 부르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순간인가... 


    다행히, 이번 서울올림픽 개막식 선수 입장에서는 중국대표팀은 더 이상 군대처럼 입장하지 않았다. 비록 하얀 정장 차림이 여전히 촌스럽기는 마찬가지 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대열도 맞추지 않고 입장하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그때 중국은 한창 개혁개방을 부르짖고 있었고, 드디어 돈에 눈을 뜬 거대한 국가와 국민들이 바깥세상과 발을 맞추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 달간의 군사훈련이 끝나고 우리는 드디어 대학 수업을 맞이했다. 조선어문법이니 고대조선어니 시조문학이니 현대한어니 세계문학사니 등등 10여 권의 교과서를 배포받았다. 그 후 며칠간 각 과목 교수님들이 차례로 등장해서 느릿느릿한 말투로 강의를 진행했다. 수능을 준비하던 고등학교 수업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잘하던 수학과목이 없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 아니 유치원 때부터 10년 넘게 배우던 수학과목이 통째로 없어지다니 나는 한순간 얼떨떨하기도 하고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암튼, 내가 상상했던 대학교 수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재미없었다. 

    며칠 뒤, 군사훈련 하면서 받았던 신체검사 결과가 발표되었고 나는 교무처에 불려 갔다. 나이가 지긋한 교무처 여직원이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연변대학교병원 타이틀이 찍힌 검사일지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학생은 을형(B형) 간염이요. 전염성이 강해서 다 나을 때까지는 학교를 쉬어야 하오. 오늘 휴학계 절차 밟고 빨리 고향에 돌아가서 치료받으시오." 

    "휴학이요?"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렇소. 다 나을 때까지 휴학해야 하오. 안 됐지만..." 여직원은 덤덤하게 말했다. 나 같은 학생을 꽤 많이 "처리"했나 보다. 

    "치료받고 다 나으면 그때 다시 복학하면 되겠죠?" 

    "그렇소." 나이 많은 여직원은 여전히 서류만 들여다 보면서 나한테는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B형 간염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냥 잠깐 치료받으면 낫는 그런 질환인 줄 알았다. 36년이나 지난, 과학기술이 일취월장하는 지금도 B형 간염은 세계적으로 완치가 불가능한 질환이다. 치료제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간염 바이러스를 소멸하는 게 아니라 그냥 활성되지 못하게 잠재우는 역할 즉 수면제 역할만 하는 그런 약이다. 그리고 B형 간염은 전염병이 아니고 유전이나 수혈 같은 경로만 통해서 감염된다. 그런데 그때는 간염이라고 하면 모두 전염병이라고 인식할 때 여서 다들 꺼려했다.

    그날 강제로 "휴학" 당한 나는 그동안 많이 친해진 88학번 조문계(한국어학과) 동창들과 변변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서둘러 기숙사 짐들을 정리해서 학교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친구들 더러는 많이 아쉬워했다. 그들은 버스정류장까지 배웅 나와서 꼭 잘 치료받고 다시 오라고 했다. 

    연변대에 입학한 지 달포 정도밖에 안 됐지만, 나는 꽤 정이 들었다. 우리 반은 학생수가 50여 명이나 되다 보니 어떤 친구들은 이름도 아직 다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연변 지역 출신들이고 더러는 나처럼 흑룡강성이나 요녕성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한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나는 그게 엄청 부러웠다.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 지역이나 나처럼 오지 마을 조선족 동네에서 초중고를 다닌 애들한테는 한어는 그냥 외국어 그 자체였다. 그나마 한어로 된 소설이나 잡지 같은 건 꽤 잘 읽어 보는데 대화는 어려웠다. 평소에 중국사람(한족)들과 대화할 기회가 적었던 우리가 서툰 한어로 대화를 시도하면, 그 친구들은 배꼽 잡고 웃어댔다. 발음도 틀리고 문법도 틀리고 단어 선택도 틀리고 대화다운 대화가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이틀 동안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바꿔 타면서 대오사구 마을로 돌아오니, 부모님은 물론이고 온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라 했다. 그분들은 을형(B형) 간염이 뭔지도 몰랐고 그저 대학을 그만둘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중앙정부로부터 지시가 내려와 중국 모든 지역에서 B형 간염 검사를 해보니 성인의 약 30%가 B형 간염이었고, 그건 대오사구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에 이처럼 B형 간염 환자가 많은 건, 주요 원인은 비과학적인 수혈과 주사기 사용이었다. 아직 1회용 주사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유리소재의 주사기를 끓는 물에 소독해서 수 백번 반복 사용했기에 혈액을 통한 감염이 심각했고 낙후한 의료시스템으로 인한 정기 검진 등의 부재로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둘 다 간염보균자여서 유전적으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나에게 부모님은 많이 미안해하셨고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듬해, 고등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도 B형 간염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한테 화풀이했다. 내가 자기한테 전염시킨 거라고... 


    동녕현인민병원에 가서 을형(B형) 간염 치료제가 있냐고 물으니 그런 게 없다고 했다. 하긴, 지금도 없는데 1988년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실 B형 간염이라고 하지만 나는 몸에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간 부위도 통증 같은 증상을 전혀 못 느꼈고 식욕부진이라든지 피곤함이라든지 황달증상이라든지 등 간염 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증상도 전혀 없었다. 엄격히 따지면, 난 B형 간염 환자가 아니라 그냥 보균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의료 수준으로는 그런 걸 구분할 줄 몰랐다. 의사 선생님은 술 마시지 말고 너무 무리하게 육체노동이나 운동 같은 걸 하지 말고 잘 휴식하면 낫는다고 했다.

    처방전도 없고 치료계획도 없고 그냥 잘 휴식하면 된다니 긴가민가 했지만, 그래도 좀 안심이 되었다. 잘하면 다음 학기에는 복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몰라서 휴학할 때 가져온 교과서들을 보면서 보충시험 준비를 해 나갔다. 그리고 모교에 가서 선생님이랑 재수를 하는 동창들도 가끔씩 만나서 회포도 풀었다. 그중에는 훗날 나에게 큰 도움과 영향을 주었던 친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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