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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zi Apr 27. 2024

安子, Who are you?

4부  사라진 1989

9화. 사라진 1989 


    그렇게 정신없는 1988년을 보내고 1989년이 조용히 찾아왔다. 생활은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그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지금 보면 세계의 대변혁은 거의 다 봄에 발생하는 것 같다. 조선의 3.1 독립운동도 그렇고, 중국의 5.4 청년운동도 그렇고, 훗날 서울의 봄도, 아랍의 봄도,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운동도, 그리고 중국의 1989년 천안문사태도 모두 봄에 일어났다. 

    3월 초, 복학을 위해 나는 연변대학교병원에 찾아가서 다시 B형 간염 바이러스 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양성이었다. 의료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지금도 B형 간염은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인데, 그때는 그런 걸 몰랐다. 크게 실망한 나는 연변대학교는 가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집에 들어박혀서 두문불출했다. 말 수도 적어졌고 몸도 게을러졌다.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엄마가 언제부터인가 내가 자꾸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비록 전공의는 아니지만 나름 마을사람들로부터 "의술"을 인정받는 맨발의사(赤脚医生,50년대 60년대 중국에서 기초훈련만 받고 농촌 지역에 파견된 의료 제공자)인 마을진료소 안의사한테 내 증상을 설명하고 무슨 원인인지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휴학 중인걸 알고 있었던 안의사는 아마도 우울증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디 멀리 친척집에라도 가서 좀 놀다 오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엄마는 나더러 다칭시에 있는 작은 이모네 집에 가서 며칠 놀다 오는 게 어떠냐고 했다. 다칭시는 중국 유명한 석유도시이다. 지금은 석유가 별로 나지 않아서 도시 전체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다칭 사람들은 온 국민이 선망하는 선진공업도시 시민들이었고,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인 여유와 자신감이 있었다. 


    4월 하순 어느 날, 다칭 번화가로 놀러 나간 나는 거리에서 행진하는 대학생들을 보았다. 수 백명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서 플래카드와 큰 깃발 같은 걸 들고 구호를 웨치며 행진하고 있었다. 큰 깃발에는 다칭모모대학, 동북모모대학, 흑룡강모모대학 등 대학교 이름이 적혀 있었고 플래카드에는 "반부패 반탐오" "중국은 민주가 필요하다" "후야오방총서기를 추도한다" 등등 상당히 급진적인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리더의 구호에 따라 플래카드에 적힌 구호들을 하나씩 웨치면서 어딘가로 몰려 갔다. 휴학 중이긴 하지만 나도 대학생인지라 시위대열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그 무렵, 북경이나 상해 등 대도시에서 대학생들이 데모하고 있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자주 보도되어 알고 있었지만 그 시위현장을 오늘 다칭에서 볼 줄은 몰랐다. 시위장면도 처음이고 또 신기하기도 해서 옆에서 얼굴 절반을 스카프로 가린 채 걷고 있는 여학생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고? 

    여학생이 나를 힐끔 보더니 대학생이냐고 물었다. 아마도 그 시절 내가 계집애처럼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어려 보였나 보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어느 대학이냐고 물었다. 

    "옌따(延大, 연변대학교의 중국어 줄임말)"라고 했더니 머리를 돌려 내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북경에 있지 않고 여기 있어? 다칭사람이야?" 여학생이 구호를 웨치다 말고 물어보았다.

    북경? 무슨 소리지? 나는 의아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분위가 아니어서 그냥 "지금 휴학 중이야"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여학생은 나를 북경에 있는 중국인민대학교 학생으로 오해했다. 내가 연변대를 줄여서 말한 "옌따"가 동북사투리로는 중국인민대학교를 지칭하는 "인따"(人大)라는 발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대학교는 글로벌 순위는 높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열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거의 칭화대나 북경대와 맞먹는 파워를 가진 탑클라스 중점대학교다. 거기 대학생이라면 모두가 우러러보는 수준이었는데 요즘 말로 "핵인싸"인 셈이다. 

    학생들이 또 구호를 위치기 시작했고 나도 덩달아 같이 웨쳤다. "중국은 민주가 필요하다!" "부패와 탐오를 반대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걷더니 시청 근처 시민광장 앞에서 시위대는 멈춰 섰다. 학생 리더가 스피커를 들고 학생들 앞에 섰다. 

    "여러분, 지금 중국은 부패와 탐오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후야오방총서기는 그들과 투쟁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북경과 상해 등 대도시에서는 후야오방총서기를 추모하는 학생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다칭 대학생들도 그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중국 개혁개방은 이미 10년이나 되었고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는 일부 탐관오리들이 다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우리 대학생들은 이걸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부패와 탐오를 반대하고 민주와 자유를 쟁취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격앙된 목소리로 구호를 웨쳤다. "부패반대! 탐오반대! 민주를 달라! 자유를 달라!" 

    그러자 학생들도 따라서 웨쳤다. "부패반대! 탐오반대! 민주를 달라! 자유를 달라!" 

    광장 주변으로 더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시청 쪽에서도 경찰들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아까와 비슷한 내용으로 10분 정도 더 연설하던 학생 리더는 오늘 오전은 이만하고 점심 먹고 다시 이곳에서 모인다고 했다. 그리고 해산! 하고 웨쳤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여기저기로 흩어지자 감시하던 경찰들도 시민들더러 모여 있지 말라고 권고하고 다녔다. 나는 어디로 갈까 하고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스카프 여학생이 나를 힐끔 보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일단 따라가 보기로 했다. 

    여학생은 내가 따라 오든 말든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광장을 가로질러서 골목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부랴부랴 따라가며 바라보니 그녀는 데님재킷과 아이보리 면소재 바지 차림에 바닥이 엷은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아마도 몸매가 날씬해서 그런지 키가 좀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옆으로 멘 파란 캔버스 원단의 멜빵가방에는 둘둘 말아서 넣은 흰 천으로 만든 플래카드가 삐죽 나와 있었다. 아까는 시위대에 끼어 있어서 몰랐는데 그녀 몸에서 오이향 비누냄새가 살짝 풍겼다. 

    그렇게 한참을 뒤에서 쫓아가다가 나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그녀 옆에 서서 걸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점심 먹으러." 그녀는 얼굴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내리며 나를 보지도 않고 계속 걸어갔다. 옆에서 힐끔 보니 굉장히 미인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은 우유처럼 하앴고 오뚝한 콧대며 조금 뾰로통 해 보이는 빨갛고 작은 입술, 그리고 긴 속눈썹과 조금 매서운 눈초리,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단발머리, 나는 지금껏 이렇게 예쁜 여자는 본 적 없었다. 나중에 한국가수 아이유를 보고서야 그때 그녀가 아이유를 살짝 닮았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점심?" 

    그러고 보니 구호를 많이 웨쳐서인지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시티즌 손목시계(연변대 입학을 축하해서 아버지가 한 달 월급을 다 주고 사주신 생애 첫 손목시계다)를 들여다보니 바늘이 11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먹으러 굳이 왜 골목길로 들어왔지? 아까 광장 그쪽에도 식당이 많던 것 같던데...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계속 따라붙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니 바로 앞에 만두가게가 보었다. 그녀가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곧장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가게 앞에는 간장병이며 식초병이며 나무젓가락을 넣은 수저통이 놓여 있는 낡은 접이식 테이블 두 개와 역시 오래된 쪽걸상(등받이가 없는 낮은 나무의자)이 몇 개 놓여 있었고, 활짝 열어젖힌 창문 안으로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만두시루며 밀가루 포대며 만두소를 담은 플라스틱 대야 등이 보었다. 한쪽 부엌에서는 몇 층을 쌓아 올린 만두시루에서 한창 증기를 뿜어내며 만두를 찌고 있었고, 다른 한쪽 테이블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가게문을 등지고 서서 숙련된 동작으로 만두를 싸고 있었다. 식당이라기보다는 만두만 취급하는 테이크아웃 점포로 보었다. 문밖에 놓인 접이식 테이블은 아마도 아침식사를 하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중국 도시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집에서 아침을 먹지 않는다. 대부분 출근길에 집 근처나 회사 근처 식당들에서 만두나 국수, 두유 같은 것으로 대신한다. 다칭이모네도 그랬다. 


    그녀는 "엄마, 나왔어." 하면서 가게 문에 걸린 모기장을 한쪽으로 걷어 올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힐끗 뒤돌아 보더니 조금 언짢은 듯 "오늘도 시위 나간 거야?"라고 묻고는 계속 만두를 쌌다. 

    "음"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는 멜빵가방을 벽에 박아 놓은 못에 걸어두고 어머니 옆에 서서 만두 싸는 걸 도와 드렸다. 내 존재는 잊은 것 같았다. 나는 창밖에 서서 말없이 만두만 싸고 있는 그들 모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두 모녀는 다 싼 만두를 시루에 옮겨 담고 시루를 몇 개씩 올려 쌓았다. 아주머니가 창밖에서 기다리는 나를 손님으로 오해했는지 잠깐만 기다려라고 하셨다. 몇 분이면 다 익는다고.

    "내 친구야"하고 그녀가 아주머니한테 말했다. 

    내가 "안녕하세요"하고 머리를 꾸뻑하자 아주머니가 좀 놀랬는지 내 얼굴을 한참이나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문밖에 있는 쪽걸상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한눈에도 맘씨 착한 아주머니라는 걸 느꼈다. 얼굴엔 고된 삶을 살아오신 흔적이 역력했지만 아름다운 미모를 다 가리진 못했다. 그녀는 엄마를 많이 닮은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다 익은 만두 한시루 들고 나와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랑 마주 앉았다. 아주머니가 노란 좁쌀죽 두 그릇을 우리 테이블로 내왔다. 나는 일어서서 꾸뻑 인사했다. 아주머니는 나더러 많이 먹으라고 하고는 웃으면서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녀는 식초병을 집어서 자기 접시에 조금 따르고는 내 접시에도 따라 주었다. 

    "식겠다. 빨리 먹자." 그녀는 시루 속에서 김이 물물 나는 만두를 하나 집어서 접시에 따라 놓은 식초에 살짝 찍고는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나도 그녀처럼 만두를 집어서 식초에 살짝 찍고 한입 베어 먹었다. 다진 고기랑 배추를 섞어 넣은 만두는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배가 고팠는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만두를 먹었다. 

    "난 리설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만두 하나를 집어서 식초에 찍으면서 그녀가 물었다. 

    "안동훈라고 해." 나는 씹던 만두를 꿀꺽 삼키고 내 이름을 말해 주었다. 

    "안? 안동훈? 너 혹시 조선족이야?" 그녀는 만두를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물었다. 한족들은 안 씨 성이 극히 드물다. 

    "음. 조선족이야." 나는 그녀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초리가 조금 매서워 보었지만 그게 더 매력적으로 보었다. 

    그녀는 내가 빤히 쳐다보자 무안했던지 눈길을 돌려 가게 안을 보는 척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남은 좁쌀죽을 말끔하게 긁어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넌 왜 북경에 있지 않고 다칭에 있어?" 그녀가 또 이상한 얘기를 했다. 

    "내가 왜 북경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빤히 보았다. "너 인따(人大) 학생이라며? 그러니까 지금 북경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야?" 

    역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서툰 한어로 "앤따(延大)는 연변에 있잖아? 그리고 난 지금 휴학 중이야."라고 대답하자, 

    "옌따(延大)? 연변대학? 런따(人大, 인민대) 아니고?" 그녀는 적잖이 실망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런따(人大)의 동북사투리 발음이 인따(人大)여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런따(人大)는 나처럼 변방의 오지 시골학생이 언감생심 "흑심"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대학교가 아니었다. 솔직히 다칭시처럼 인구 수백 만 명의 큰 도시에서도 칭화대나 북경대, 인민대 같은 당대 중국 최고의 학부에 입학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실망해하는 걸 보고 나는 좀 무안했다. 내가 런따(人大) 학생이 아닌 게 한스러웠다. 어떡하라고? 나 같은 사람은 10년을 재수해도 갈 수 없는 대학인걸. 

    "몇 학년이야? 무슨 학과야?" 

    "88학번. 조선어학과." 

    "음. 근데 왜 휴학했어?"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나는 차마 B형 간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친동생조차도 나 때문에 전염됐다고 비난하는데... 

    아무리 봐도 내 몸이 어디가 불편한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는 87학번이고 다칭모모대학교 정치학과에 다닌다고 했다. 알고 보니 나이는 나랑 동갑이었다. 


    조금 후, 만두를 사러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가게 안에서 일하고 있는 어머니한테 학교 간다고 하면서 일어섰다. 아주머니는 웬만하면 시위행진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알았어" 하고는 따뜻한 물 한 모금 물고 입을 가시고 있는 나한테 어서 가자고 손짓했다. 

    나는 아주머니한테 "잘 먹었습니다" 하고 꾸뻑 인사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골목길을 돌면서 얼핏 뒤돌아보니 아주머니가 가게를 나와 우리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까 오던 골목길을 되돌아 광장까지 쭉 걸어갔다. 이번에도 그녀가 조금 앞에서, 나는 한 발짝 정도 떨어져서 따라갔다. 잰걸음으로 걸어가면서 그녀가 물었다. 

    "다칭사람 아니지? 어디서 왔어? 다칭엔 무슨 일로?" 그녀는 한꺼번에 여러 질문을 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동녕현에서 왔어. 다칭 이모네 집에 놀러 왔어." 

    "동녕? 거긴 어딘데? 처음 들어 보는 거 같아." 리설이는 키는 별로 크지 않았는데 발걸음은 나보다 훨씬 빨랐다. 

    "목단강 쪽에 있어. 소련(소련이 해체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러시아를 오랫동안 소련이라 불렀다) 국경 쪽에 있어." 

    중국 최북단에 위치한 흑룡강성은 47만 km² 면적에 인구가 3000만 명에 달하는 대성(大省)이고 성 도회지인 하얼빈을 빼고 다칭시와 행정레벨이 같은 목단강시 같은 대도시가 11개, 동녕현과 같은 현(縣, 한국의 군에 해당)급 행정구역이 67개나 있는데 동녕현은 자그마한 변두리 동네라 같은 흑룡강성 사람이라고 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흑룡강성은 중국 최대의 알곡생산기지이고 한때는 중국에서 석유와 석탄이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경제가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모네 집은 어디 있는데?" 

    "석유 2 공장구역에 있어." 

    다칭은 석유를 채취하기 위해 형성된 도시여서 산업단지와 주거단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모네가 있는 석유 2 공장은 다칭시 조성 초기 지역이어서 그나마 도심지역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석유 10 공장처럼 나중에 조성된 지역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도 원래 석유 1 공장에 살았어." 

    잠깐 뜸을 들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까 그 동네로 이사 왔어. 거실과 주방으로 쓰던 방을 개조해서 가게로 만들었고 뒤편에 방이 한 개 더 있어. 지금은 나랑 엄마랑 둘이 살아."

    "음. 우리는 시골에 살아. 아버지는 향진기업관리소에 다니시고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셔. 형제가 셋인데 내가 맏이고,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어." 나도 우리 가족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녀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따뜻한 봄날이라 광장에는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꽤 많았다. 연세가 있으신 어르신들은 광장 가장자리 여기저기 설치해 놓은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어린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거니는 아주머니도 보었다. 조금 더 큰 애들은 종이와 참대나무로 만든 연을 날리고 있었지만 바람의 크기가 고르지 않아 잘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전에 시위대를 따라붙었던 경찰들도 점심 먹으러 갔는지 몇 명만 남아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경찰 쪽을 흘끔 보고는 나에게 물었다. "나 지금부터 여기서 플래카드 들고 있을 텐데 너도 같이 할래?" 

    "뭐?!"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멜빵가방에서 오전에 들었던 플래카드를 다시 꺼내 펼쳤다. 그리고는 스카프도 꺼내서 얼굴에 둘렀다. 처음엔 난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다칭지역은 내몽고와 가까운 허허벌판에 만든 도시인지라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공기 중에 모래(황사)가 많이 날렸다. 그래서 한참을 밖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입안에 모래먼지가 많이 씹혔다. 그때는 KF94 수준의 마스크가 없을 때여서 대부분은 스카프나 수작업으로 만든 면소재의 마스크를 착용해서 미세먼지나 황사에 대비했다. 

    "넌 싫으면 가도 돼." 

    그녀는 플래카드를 가슴께로 쳐들었다. 흰 천으로 된 원단에 윗줄에는 "반부패! 반탐오!" 그리고 아랫줄엔  "중국은 민주를 원한다!"라는 아주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구호가 빨간 붓글씨로 삐뚤삐뚤 쓰여 있었다.

    중국도 헌법에는 국민은 결사, 시위, 언론자유 등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시위행진 같은 다소 "과격"한 민중행위는 결코 흔치 않다. 나는 중국 관영 TV방송에서 보내는 한국이나 미국, 유럽 등 나라들에서 발생한 데모 관련 뉴스는 자주 보았지만 중국에서 일어 난 데모 뉴스는 거의 본 적 없었다. 이번 학생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국에서 발생했던 대학생들 데모도 그 목적이나 내용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몰랐고 중국방송국에서는 군부독재와 미군주둔을 반대하는 시위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대학생들의 데모 행위 자체보다는 그들이 입은 옷이나 운동화에 관심이 더 많았다.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서 화염병을 던지던 그들 대부분은 홍콩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청바지차림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런 청바지나 운동화는 그 시절 중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리설이는 겁도 없이 1인 시위를 하려고 한다.(그때는 1인 시위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나더러 함께 하자고 한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경찰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들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변두리 오지마을에서 조선족으로 나고 자란 나는 세상물정에 대해 잘 몰랐고 별 관심이 없었다. 민주가 뭔지 자유는 또 뭘 의미하는지 부패나 탐오는 또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때 내 최대 관심사는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연변대학교로 복학하는 것이었다. 다칭에 놀러 온 것도 스트레스를 풀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지 이렇게 이상한 시위행진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경찰들 코앞에서 그걸 감행하려고 하는 예쁘고도 겁 없는 여학생한테 "낚여서" 그 무서운 일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어쩌지? 해야 하나? 도망갈까?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그 몇 초 사이 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경찰 두 명이 천천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 혹시 잡혀 가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나 여기서 며칠째 이러고 있었어. 잡아 갈려면 벌써 잡아갔겠지." 

    "우리 이거 반혁명은 아니겠지?" 

    "우리 이거 애국하는 거야."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이 겁 없는 여학생한테 호기심을 느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졌다. 

    "애국 그런 거 난 몰라. 그런데 어쩌겠어? 점심도 얻어먹었는데 할 수 없지 뭐. 같이 있어 줄 수밖에." 내가 서툰 한어(중국어)로 농담하자 그녀가 눈을 곱게 흘기고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구호는 웨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서 있었는데도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중국사람들은 재밌는 볼거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느새 우리 가까이 도착한 경찰들은 주변 시민들한테 모여들지 말라고 권고만 할 뿐, 우리한테 물리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멀리서 시민들을 막는 시늉만 했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우리에 대한 동정과 은밀한 격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구호를 웨쳤다. 

    "부패를 반대한다!" 

    "탐오를 반대한다!" 

    "중국은 민주가 필요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와 함께 대학생 시위대 틈에 끼어서 행진을 하거나 광장에 서서 침묵시위를 했다. 데모가 없는 날에는 그녀 어머니 가게에 가서 만두 싸는 걸 함께 도와 드리고 만두와 좁쌀죽, 두부국 같은 걸 얻어 먹었다. 그녀는 나에게도 플래카드를 만들어 주었는데 "반부패! 반탐오!"만 적혀 있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하는 짓이 그리 탐탁지는 않았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안전에 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하실 뿐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모네 집에서 지내면서 낮에는 그녀랑 함께 데모하고 밤에는 이모네 집에서 TV를 시청하면서 중국 각지의 학생운동과 당국의 대처 등 정세 변화를 지켜보았다. 워낙 중대한 사태라 저녁 7시 중국관영 TV인 CCTV 뉴스시간이 되면 대부분 중국사람들이 만사 제쳐놓고 학생운동 관련 뉴스를 시청했고 그 내용을 가지고 가족끼리 혹은 지인들끼리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다퉜다. 나 역시 당간부인 이모부와 자주 부딪혔다. "얹혀"사는 주제에 "집주인"한테 대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는 보름정도 시위행진으로 "세뇌"가 되었는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리고 비록 철없는 대학생이긴 해도 시시비비는 얼마든지 가릴 수 있었기에 대학생들의 주장에 100% 동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간부인 이모부는 지금의 중국문제는 "인민내부" 모순이기에 시위나 파업 같은 "과격"한 행위가 아니라 충분한 협상과 토론을 거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모부한테 일당독재 체제하에서는 자체 감독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권력을 쥔 간부는 지위가 높을수록 더 쉽게 탐오하고 횡령하는게 아니냐, 그리고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파업이나 데모는 왜 중국에서는 못하게 하느냐며 따졌고 자체감독이 가능했다면 작금의 학생운동이 왜 일어났겠냐며 핏대를 세웠다. 그때마다 조선어를 알아 못 듣는 사촌동생들은 우리가 대체 뭘 가지고 다투는지 궁금해했다. 

    5월 중순, 북경 천안문광장에 집결한 대학생 지도자들은 집단 단식에 돌입했고, 총서기나 총리와의 대면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까운 하얼빈을 포함해서 중국 대부분 대도시에서는 이미 학생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고 적지 않은 시민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과격한 행동이나 물리적 충돌은 아직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전국 각지 대학생들이 북경 대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북경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리설이가 나한테 나직이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도 북경 가기로 했어. 나도 가려고."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떡 었다. 나는 이젠 그녀 눈빛만 봐도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내가 뭐라고 물어보려 하자 그녀는 나에게 쉿, 하고는 가게 안에서 바쁘게 돌아치는 어머니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주머니랑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나도 덩달아 아주머니 눈길을 피했다. 


    골목길을 걸어가는 그녀 얼굴은 진지했다. "북경 상황이 좋지 않대. 중앙정부 지도자들이 학생지도자들을 만나 주지도 않는대. 심지어 학생운동을 폭동으로 취급한다는 소문도 있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녀 옆에서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예쁜 여학생이랑 나란히 걷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우린 곧 출발할 거야. 넌? 같이 가지 않을래? 아마 너희 학교 학생들도 북경에 가 있을걸." 

    난 솔직히 민주니 자유니 반부패니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 같은 소수민족 학생이 하나쯤 빠진다고 중국혁명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 조선족들은 중국 정치무대에서 "핵싸"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 아버지도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다. 조선족들은 중국땅에서 그냥 잘 살아가면 된다고. 조선족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 자신도 수없이 많은 탄광을 개발하고 운영했지만, 결국은 당신 밑에서 일하던 새파랗게 젊은 놈(한족)들만 현장(군수)이니 국장이니 좋은 자리로 승진하고 자신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다. 중국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녀랑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 같이 가." 내가 1초의 고민도 없이 흔쾌히 승낙하자 그녀는 좀 놀라는 눈치 었다.

    "그래도 아주머니한테는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어?" 

    "엄마한테는 당분간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겠다고 할래. 아시면 괜히 걱정만 할 테니까. 어차피 우린 북경에서 오래 있지는 못해. 숙소도 없고 식사도 제대로 못할 거야. 이번엔 그냥 북경학생들 지원차 잠깐 다녀오는 거야." 그러고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북경 "원정"을 준비하는 그 사이 북경 상황은 1분 1초 단위로 급변하고 있었다. 5월 17일, 1인자인 조자양총서기가 천안문광장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설득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조자양총서기는 그 후 학생운동을 동정했다는 이유로 총서기직에서 실각당했다.) 학생지도부는 곧바로 실세 리펑총리와의 대면 대화를 요구했고 5월 18일, 학생지도부와 리펑총리, 북경시장 등 주요 지도자들과의 대면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대학생들에게 조속히 천안문광장에서 철수하고 학교에 복귀해서 수업을 받으라고 했고, 학생들은 반부패와 민주화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으면 단식 중단과 철수는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결국 대화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고 학생들의 분노 게이지는 걷잡을 수 없이 폭증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9일, 우리는 드디어 다칭역에서 출발했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원래는 다칭시 여러 대학교 수 백 명 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출발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십 여 명만 기차역에 모었다. 나는 이모한테는 하얼빈 흑룡강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한테 가서 며칠 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역무원은 우리들의 학생증을 보더니 표 검사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먼저 다칭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갔다가 거기서 북경으로 가는 기차로 바꿔 탔는데 하얼빈역에서는 꽤 많은 대학생들이 기차에 올랐다. 하얼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역무원들은 학생증만 보여주면 그냥 패스해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다칭에서 북경까지 차비 한 푼 쓰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기차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우리한테 성원을 보냈다. 복도에 서 있는 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생수며 맥주며 과일이며를 자꾸 권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담이 없어서 참고 살았지만 학생운동은 정말 지지한다고 말했다. 많은 분들이 작금의 관료집단이 얼마나 부패하고 공권력이 얼마나 패악했는지를 토로했다. 우리더러 반드시 사회변혁을 이루어 달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오후 늦게 하얼빈을 출발한 급행열차(그 시절 가장 빠은 기차)는 새벽녘에야 겨우 선양(沈阳)을 지났다. 저녁 내내 승객들이랑 함께 노래하고 떠들다가 지친 학생들은 서로 몸을 기대고 서서 꾸뻑꾸뻑 졸았다. 어떤 승객은 자기 자리를 학생들에게 양보했지만 학생들과 승객들이 워낙 많다 보니 나와 리설이 포함 많은 학생들은 객차 복도에 서서 졸았다. 나는 의자 모서리에 등을 받치고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했고 리설이는 다른 여학생과 서로 등을 기대고 잠을 청했다. 어찌나 피곤하고 불편한지 콩나물시루처럼 복도에 빼곡히 선 승객들만 아니었으면 복도에 드러누워 다리를 뻗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떠올랐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연변대 기숙사에서 자다가 침대에서 쿵 하고 굴러 떨어졌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보니, 리설이가 내 품에 비스듬히 안겨서 달게 자고 있었다. 그녀는 이마를 내 어깨에 살짝 붙이고 잠들어 있었는데 그녀의 따듯한 숨결이 쇄골 언저리에 규칙적으로 와닿았고 가느다란 왼팔은 내 복부에 반쯤 둘러 있었다. 객차 내 혼탁한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오이향 비누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자 나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그녀가 깰까 봐 조심스레 몸을 펴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무심결에 얼핏 내려다보니 단추가 풀린 그녀의 흰 셔츠 옷깃 사이로 살짝 패인 하얀 가슴골이 눈에 훅 들어왔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했다. 하지만 그녀의 우유처럼 하얀 가슴골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고 심장은 더 큰 소리로 쿵쿵 뛰었다. 그리고 더 난감한 건 힘이 잔뜩 들어간 아랫도리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도 스무 살 젊은 남자의 본능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본다. 내 몸에 밀착한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 감촉 때문에 아랫도리는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내가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틀자, 동작이 컸는지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이 내 품에 안겨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급기야 나를 밀치고는 몸을 일으키고 수줍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눈을 피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척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기대거나 끌어안은 채 여전히 정신없이 자고 있었고 철컥 철컥하고 레일을 지나는 기차바퀴 소리만이 고요한 객차 안에 울려 퍼졌다. 

    “어디까지 왔지?” 그녀가 차창밖을 내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곧 진저우(锦州)역에 도착해. 피곤하지? 여기 기대서 좀 더 자" 나도 어색한 분위를 깨려고 내가 기대고 있던 기차 등받이를 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그녀가 나지막하게 속삭이고는 파란 멜빵가방을 꼭 잡고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비집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나는 저려 난 다리를 주무르면서 잠시 안정을 찾았고 팽창했던 아랫도리도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5월 20일 오전 7시, 우리가 객차당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을 긴 줄을 서가며 세수하고 양치하고 있는데 열차에서 아침방송이 흘러나왔다. 중국정부가 오늘 새벽 북경시에 계엄령을 내렸고 이번 학생운동을 반혁명폭동으로 규정지었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과 승객들은 놀란 나머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서로 수군거렸다. 어떤 학생들은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생들이 모두 반혁명폭도라도 된다는 얘긴가요?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학생운동도 애국운동입니다. 중앙 지도자들이 어찌 우리 대학생들을 이렇게 대한단 말입니까?"

    "반혁명"이라는 단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어마무시한 의미를 가진다. 문화대혁명 같은 대동란 시기에는 가족 중에 누군가가 "반혁명죄"로 잡혀가면 나머지 가족들은 취학, 취직, 승진, 입당, 사회생활 면면에서 불이익을 당한다. 그 시절 중국에서 "반혁명죄"는 최고형량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10년이나 진행된 중국에서 다시 "반혁명"을 거론한다는 것은 아주 엄중한 사태가 발생하었거나 곧 발생하게 될 거라는 징조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북경은 이미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하니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연세가 그윽한 승객들은 더 이상 학생들을 부추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승객은 학생들에게 지금 북경에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일단 학교에 다시 돌아가서 후일을 기약하는 게 어떠냐고 권고하기도 했다. 

    다들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열차장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철도당국의 지시를 받았는데 더 이상 대학생들을 기차에 태우지 말라고 한단다. 그리고 지금 기차에 타고 있는 대학생들도 다음 역에서 내려서 북상하는 기차를 타고 학교로 다시 복귀하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복귀하는 학생들은 기차표를 사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었다. 열차장은 한동안 그 내용을 여러 번이나 반복해서 방송했다. 


    장장 15시간을 달린 급행열차는 곧 텐진역에 당도한다. 이제 2시간 뒤면 계엄령이 발동된 중국의 수도 북경에 도착한다. 그동안 학생들과 승객들은 서로 자리도 양보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고 떼창도 부르면서 그 긴 시간을 함께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계속 북경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텐진에서 하차해서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고 학교에 복귀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조용히 다른 사람들 대화를 듣고만 있던 리설이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인터내셔널가"(중국에서는 "국제가"라고 함)였다. 이 노래는 어젯밤 이 기차에서 우리가 승객들과 함께 수도 없이 떼창으로 부른 노래다. 아시다시피, "인터내셔널가"는 공산국제의 주제가이며 각국 공산당의 "당가(党歌)"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대학생들은 그 노래를 부르면서 팀워크를 다지고 공산당에 "대들고"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지막하게 부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비장함 같은 게 느껴졌다. 다른 학생들도 낮은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일부 승객들도 같이 불러 주었다. 어젯밤 고성방가와는 달리 다들 나지막하게 불렀지만 분위기는 훨씬 더 무겁고 엄숙했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사태가 심각하니 모두 텐진에서 내리자고 했다. 그렇다고 누구도 우리를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을 거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동안 다칭에서도, 어젯밤 이 열차에서도 내가 본 그녀는 항상 조용한 존재였고 한 번도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 조용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학교 복귀를 권고하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조금 낯설었지만 훨씬 더 강한 카리스마를 느꼈다. 

    다른 승객들도 "맞는 말이다, 군대도 동원될 텐데 무작정 북경으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일단 텐진에서 내려서 동북에 다시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권고했다. 

    잠시 망설이던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둘씩 선반에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기차가 텐진역에 도착하고 학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플랫폼에 내려섰다. 다른 객차들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승객들과 같이 기차에서 내리고 있었는데 다들 허탈한 표정이었다. 이제 개찰구를 나갔다가 다시 대합실에 들어가서 동북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 된다. 어차피 표는 공짜다.

    우리는 승객들 사이에 껴서 개찰구로 나가는 지하계단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북경으로 가는 텐진 손님들이 방금 우리가 내린 기차에 올라타고 있었고 플랫폼에 잠깐 내려 담배를 피우는 승객들을 향해 승무원들이 이제 곧 열차 문을 닫을 테니 빨리 기차에 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이 기차는 이제 곧 종착역인 북경으로 출발하게 된다. 

    지하계단 입구를 몇 걸음 앞에 두고 리설이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끌고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바로 옆에서는 우리가 타고 왔던 기차의 6호실 객차 승무원이 기차에 올라타서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리둥절 해 하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녀가 갑자기 까치발을 들고 내 입술에 살짝 기습 키스를 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우리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흠칫 놀란 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동훈야 잘 가" 하고는 곧 문이 닫히려는 기차에 뛰어올랐다. 

    나는 "왜?" 하면서 그녀를 불렀지만 이미 문이 닫힌 뒤었고, 창문 안쪽에서 그녀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객차 안으로 사라졌다. 너무 한순간에 일어 난 일이라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객차 안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초후, 푸른색 외피의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를 따라 걸으면서 객차 안을 살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기차가 점점 속도를 올리더니 나를 버려두고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동안 그림자처럼 그녀만 졸졸 따라다녔던 나는 갑자기 혼자가 되자 너무 허탈하기도 하고 외로운 나머지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철도당국에서 귀교하는 학생들에게 모두 자리표를 내주어서 올 때보다는 훨씬 편하게 돌아갔지만, 나는 온통 그녀 생각에 무슨 정신으로 하얼빈역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4월 하순 다칭 어느 번화가의 시위행진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짧디 짧은 3주 동안 나는 참으로 기이하고 "파란만장"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녀도 나도 모두 말수가 적어서(사실은 내 중국어가 서툴러서) 우리는 많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마음은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를 최고 학부인 "런따(人大,중국인민대학교) 학생으로 오해해서 나에게 관심을 보인건 맞지만, 오해가 풀리고도 그녀는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나에 대한 그녀의 호의 심지어 호감으로 생각했고 나한테는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몰래 그녀를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아까 텐진역 플랫폼에서 "잃고" 말았다. 그녀는 계엄령이 떨어진 북경으로 서슴없이 들어갔고, 나는 혼자 "비겁하게" 동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몇 번이나 그녀를 찾아 북경에 갈 생각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국이 어지러운지라 북경에 간다고 해서 그녀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한어도 서툰 데다가 주머니에는 돈도 얼마 없었고 그리고 계엄령이니 "반혁명"이니 이런 것들은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장 비통해할 부모님이 더 걱정되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나는 기차역에서 한참을 망설 었다. 다칭에 가서 그녀 어머니를 찾아가서 그녀가 북경에 가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를 못 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없는 다칭에 다시 가 있자니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녀랑 같이 걸었던 골목길이며 같이 만두를 먹었던 그녀 어머니 가게며, 같이 행진했던 다칭의 광장과 거리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습 키스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마지막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너무 괴로웠다. 다른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면 되지만 나는 아직 휴학 중이라 돌아갈 학교도 없었다. 

    일단 대오사구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만이 내 유일한 안식처였다. 


    고향에 돌아간 나는 예전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증상은 없어졌지만 말수는 훨씬 더 적어졌고 시간만 나면 TV를 보고 라디오에서 뉴스를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근을 했고 여동생은 읍내 조선족 고등학교에서 기숙생활을 했기에 토요일 오후에 귀가해서 일요일 오후 버스로 다시 읍내로 돌아간다. 남동생은 아직 장난기 많은 초등학생이라 항상 저녁식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랑 나이차이가 많아서 그런지 이 녀석은 나를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5월 말이 되자 북경사태는 점점 험악해져 갔다. 뉴스에서는 천안문광장에서 농성을 벌이던 지방대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철수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리설이도 다칭에 돌아왔을까?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 소식을 알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녀 어머니 가게에 전화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다칭모모대학교 정치학과 87학번 학생이라는 정보만 빼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너무 답답하고 걱정되고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뜨거운 가마 속의 개미(热锅上的蚂蚁,조급해서 갈팡질팡 한다는 중국식 표현)가 어떤 심정일지 알 것 같았다.


    6월 4일 일요일 오전, 아버지는 새로 채굴을 시작한 탄광에 문제가 생겨서 아침 일찍 출근했고, 어머니는 여동생이랑 함께 강가에 빨래하러 간다며 나갔고 남동생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침 먹고 사라졌다. 북경은 천안문사태로 난리법석인데 대오사구 마을은 예전과 다름없이 평온했다. 농사꾼들은 논이며 밭이며 농사일하기에 바빠서 멀리 북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는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무릉도원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전날 저녁 TV뉴스에서 계엄군이 북경에 입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밤새 리설이가 걱정돼서 잠을 설쳤다. 드디어 9시 중앙인민방송국 라디오 뉴스 채널이 시작되었다. 남자 아나운서가 어젯밤 계엄군이 북경에 입성하는 과정에 일부 폭도들이 철근이나 몽둥이 등 흉기를 들고 인민해방군(중국군의 공식명칭)을 공격하다가 학생들과 계엄군에 의해 제압당했다고 하면서 인민해방군은 새벽(4일)에 천안문 진입에 성공했다고 소개했다. 학생들과 계엄군이 한패라고? 나는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디오는 "아직도 북경 일부 구간에서 소요사태가 산발하고 있지만 계엄군은 이미 모든 지역을 통제하고 있다" 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요사태 중 일부 학생들과 시민 그리고 적지 않은 해방군전사들이 다쳤는데 이미 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고 있다고도 했다. 나는 리설이가 벌써 북경을 떠났기를 바라면서도 혹시라도 그녀가 아직도 북경에 남아 있다가 다친 건 아닌지 너무도 걱정되었다. 그때 그녀가 텐진역에서 기차에 뛰어오를 때 함께 올라타지 못한걸 나는 수백 번도 넘게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리설이가 너무 걱정되어 다칭에 가보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거짓말을 했다. 연길에 가서 을형간염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아버지가 "지금은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소문에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같은 데서 학생증을 가진 승객들 상대로 검문이 잦다고 하더라"라고 하셨는데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중국정부는 학생운동 지도자 20여 명에 지명 수배를 때렸고 각 지역의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녀 학교로 편지를 쓰는 것 외에는. 


    나는 책상에 노트를 펼쳐 놓고 그녀한테 편지를 썼다. 

    먼저, 그때 텐진역에서 헤어진 후 나는 곧장 고향으로 돌아왔고,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넌 다칭에 무사히 돌아왔느냐, 북경에서는 별일 없었냐, 학교는 복학했냐 등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한어(중국어)가 서툴러서 표현을 잘 못하지만 다칭에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너한테 호감을 가졌어. 너랑 함께 하는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너랑 함께 있는 게 즐거웠어. 하지만 나 같은 평범한 남자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격지심에 고백할 엄두도 내지 못했어. 그리고 어차피 내가 다칭을 떠나면 넌 나 같은 건 깨끗이 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텐진역에서 네가 나한테 키스했을 때 난 세상을 모두 가진 기분이었어. 그리고 슬펐어. 네가 탄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난 모든 게 끝나버린 것 같은 절망을 느꼈어. 난 지금도 네 소식이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아. 네가 나한테 한 그 키스, 너한테는 별 의미가 없었다고 해도 난 괜찮아. 난 그냥 네가 안전하게 다칭에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그걸로 만족해. 그러니까 꼭 안부 전해줘."

    나는 그 편지를 몇 번 더 읽어 보고 틀린 글자는 없는지 문법은 맞게 사용했는지 오해 소지는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편지장을 두 번 접어서 편지봉투에 넣고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30km를 달려 읍내 우체국에 가서 그녀 학교로 부쳤다. 우체국에는 3년 전에 나한테 한국을 남조선이라 적으라고 야단쳤던 남자직원이 아직도 근무하고 있었다. 다만 몇 년 사이 부쩍 늙은 것 같았다. 


    7월이 되어서도 그녀한테서는 회신이 없었다. 한 번은 읍내에 고등학교 친구 만나러 갔다가 아버지 사무실에 들러서 그녀 대학교로 전화를 해 보았다. 정치학과로 연결해서 87학번 리설학생을 찾는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두근두근 마음 졸이며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기는 아무 동정도 없었다. 이 전화를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전화기에 대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있는데 담당자가 전화기에 대고 "우리 학과에 그런 학생은 없는데요"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7월과 8월 나는 그녀한테 여러 번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강물에 던진 돌처럼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던 나는 그해 여름방학에도 다칭에 놀러 가겠다고 여러 번이나 떼를 썼지만 어지러운 시국이 걱정되었던 아버지가 끝내 보내주지 않았고 나는 두 달 넘게 혼자서 속을 끙끙 앓았다. 


    9월 초, 연변대에 복학한 나는 을형간염(B형 간염) 검진 결과 여전히 양성을 띠는 바람에 하마터면 자진퇴학권고(두 번 휴학은 불가능했다)를 받을 번 했지만, 외삼촌의 도움으로 교무처 담당자한테 조금 비싼 술 두 병과 현금 200위안을 "뇌물"로 주고 겨우 기숙사 생활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순조롭게 복학절차를 마쳤다. 대학생들이 왜 목숨 걸고 "반부패 반탐오"를 웨치며 학생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그때 그 교무처 담당자 표정을 보고 절실히 느꼈다. 그 얼굴엔 "성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절대 허락 안 해” 라고 쓰여 있었다.

    복학절차를 마치고 나서 그녀 대학교로 또 전화를 해보았다. 정치학과 담당자가 이번에도 우리 학과엔 그런 학생이 없는데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포기할 수가 없어서 또 그녀한테 편지를 썼다. 

    "난 지금 연변대로 돌아와서 복학 중에 있어. 너한테 편지도 보내고 전화도 했는데 널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해 죽겠어. 너도 지금 대경에서 학교 다니고 있겠지? 그때 북경에서 별일 없었겠지? 너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아. 아무래도 다칭에 한번 가봐야겠다. 마침 지금 89학번 학생들이 군사훈련 중이라 정식 수업까지 시간 좀 있어. 다칭에 가서 널 꼭 만나야겠어." 

    혹시라도 내가 그녀 대학교 이름을 혼돈한 게 아닌가 싶어서 나는 그 편지를 몇 장 더 베껴 써서 대경에 있는 거의 모든 대학교 정치학과 87학번으로 부쳤다. 2주 더 기다려서 회신이 없으면 나는 다칭에 직접 가 볼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그녀 생사를 확인하지 않고는 수업이든 학교생활이든 제대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9월 하순, 내가 연길역에 가서 이틀 후 출발하는 기차표를 사가지고 숙소에 와보니, 내 침대에 하얀 봉투의 편지가 와 있었다. 나는 냉큼 집어 들었다. 편지봉투에는 연변대학교 주소와 내 이름만 적혀 있었고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그녀한테서 온 편지였고 달랑 몇 줄 뿐이었다. 

    "우선, 너의 관심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그때 북경에서 바로 돌아왔고 아무 일도 없었어. 지금은 학교에 돌아와 다시 공부하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때 너를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대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 키스는 실수 었어. 별 뜻은 없었어. 미안해...

    그리고 나 사실 남자친구 있어. 그는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야. 하지만 그는 학생운동을 지지하지 않아. 우린 그때 그것 때문에 많이 다퉜어.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맞았던 거 같아. 이번 학생운동은 좀 과격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난 남자친구랑 다시 만나고 있어. 그리고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어. 열심히 공부만 하려고. 우리는 대학 졸업하고 함께 유학 갈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도 데모 같은 거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잘 살기 바래. 

    그리고 나를 잊어 줘. 나도 널 잊을게. 

    편지 더 이상 보내지 마..." 

    나는 그 편지를 열 번이고 더 읽어 보았다. 두뇌 회전이 셧다운 되었는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신변안전은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하면서 나 자신을 달랬다. 그깟 키스가 뭐라고. 그리고 88학번 친구들을 찾아가서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밤새 술을 퍼 마셨다. 


    3년 후 여름방학 끝자락에 나보다 한 살 어린 다칭 이모네 큰 딸이 결혼했다. 나는 그 결혼식에 들렀다가 연변대로 가기로 했다. 사촌여동생은 대학 진학을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느 정유공장에 취직해서 트럭 기사가 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나는 연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그 "옛날" 시위행진을 했던 시민광장을 찾아가 보았다. 

    그날도 몇 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르신들은 벤치에 앉아 따뜻한 늦여름 햇볕을 즐기고 있었고 연세가 그윽한 아주머니들은 어린 손자나 손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거닐고 있었고, 어린이들은 연을 날리고 있었다. 참대와 종이로 만든 연이 아니라 알록달록 여러 가지 컬러와 무늬, 그리고 형태를 가진 연이었다. 바뀐 계절과 "진화"한 연만 빼면 풍경은 그 "옛날"을 복사해 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나는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광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당연히 그녀는 없었다. 지금쯤 그녀는 남자친구와 함께 해외유학을 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고 나는 잠깐 그녀가 편지에서 말했던 유학 갈 거라는 말을 떠올리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 다칭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한번도 다칭에 다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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